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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지를 통해본 문단사사 40년대 「문장」지 주장-제58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무애 양주동 조차가 「오불급야」라고 손을 들었다는 노산 이반상. 노산은 아직도 젊은이들 뺨 칠만큼 문학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이분에 대한 이야기는 강기력에 대한 일화 한가지만 소개하는데 그치기로 하겠다.
1942년 소위「조선어학회」사건으로 30여명의 우리 학자들이 함경도 홍원으로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노산도 그 사건으로 유치장 생활을 하고있는 어느 날, 누가 유치장 안에 차입물을 들여보내 왔는데, 그 차입물을 싼 종이에는 글발이 적혀 있었다.
그 종이를 펼쳐보니, 거기에는「조기 한 두릅에 50전」이니 「북어 한 코에 30전」이니 「광목 열자에 1원20전」이니 하는 물품명과 가격 등이 수두룩하게 적혀 있었다.
누가 장에 가서 제수품을 사오면서 품목과 수량과 가격 등을 적어놓은 발기인 모양인데, 그 품목이 무려 30여종이나 적혀있었던 것이다.
유치인들은 감방생활을 오래 계속해오다 보니 심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 누가 노산에게 그 발기를 내밀어 보이며 이런 제안을 하였다.
『노산은 기억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으니, 이 밭기를 한번 읽어보고 나서 품목과 수량과 가격을 그대로 외어보도록 하시오.』
말할 것도 없이 노산의 기억력을 시험해보자는 것이었다. 노산의 기억력이 제아무리 좋아도 그 발기를 한번만 읽어보고 그 복잡한 내용을 정확하게 외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노산은 문제의 발기를 한번 읽어보고 이내 빼앗겼다. 그러나 노산은 그 발기를 곧 암송을 하는데, 품목과 수량과 가격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순서조차 발기문 그대로 외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놀라와 모두들 왁자지껄 떠드는 바람에 일본인 간수가 달려왔다. 일본간수는 유치인들이 떠드는 이유를 알고 코웃음을 쳤다.
『귀신이 아닌 바에야 그 복잡한 발기를 한번만 읽어보고 어떻게 욀 수 있다는 말이냐.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내가 직접 시험을 해보겠다』
이리하여 일본간수는 자기가 직접 시험을 해보기로 하고, 그 발기의 내용을 다른 종이에 뒤죽박죽으로 적어놓고 가격도 맘대로 고쳐 써서 노산에게 한번만 읽고 외어보라고 하였다.
노산은 아무 소리 없이 그 종이를 읽어보고, 그 자리에서 하나씩 외어나가는데, 일본간수가 허투루 써놓은 내용을 순서하나 틀리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외어냈다는 것이다.
일본간수는 유치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그제서야 깨닫고 진심으로 탄복한 나머지, 그때부터는 노산을 신처럼 높이 받들어 모셨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그 사실을 말로만 들어왔지, 직접 목격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산을 오래 대해보는 동안 그의 강기력에는 나 자신도 깜짝깜짝 놀란 때가 여러번 있었다.
노산은 지금도 후배들의 글을 읽어보다가 잘못된 데가 있으면 전화로 교정해주는 사랑을 베풀어주고 있지만, 지금 내가 쓰고있는 『명기열전』을 위해 자료를 직접 제공해준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노산의 기억력은 그처럼 초인적이기에 작년 가을엔가는 『지금도 책을 한번만 읽으면 죄다 외고 계십니까』고 물었더니, 노산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옛날 같지 못해서 남의 글을 죄다 외기는 어려워. 그러나 옛날에 읽은 글과 내가 쓴 글만은 지금도 죄다 외고 있기.』
70고개를 훨씬 넘어선 고령에도 기억력이 그처럼 왕성하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과거에 읽은 수많은 경서들을 일생동안 머리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오는 셈이니, 어느 도서관인들 그의 머리를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무애와 노산, 노산과 무애는 한 세기에 한두 사람쯤 나올까 말까한 강기력의 천재들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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