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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타협하는 게 민주주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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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의견 차이와 이해 갈등을 토론과 타협으로 극복해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합의에 도달하기보다는 극단적 갈등과 대립, 당리당략에 빠져 문제해결 능력과 기회를 상실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쓰레기 소각장이나 핵폐기물 저장시설의 건설에서부터 최근의 두산중공업 노사분규, 이라크 파병 결정까지 우리 사회는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죽기살기 식의 강경 대치로 몰고가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구성원간의 견해 차이와 이해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일이다. 다만 한 국가의 운명은 그런 갈등을 얼마나 지혜롭게 승화시켜 국가전략으로 발전시켰는가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보았다.

***국론 통합에 나라 운명 달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후기 나라가 기울어지는 와중에도 당파싸움에 몰두했던 당시 지도층이 그랬고, 광복 후 같은 민족끼리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까지 치른 것도 마찬가지다. 가깝게는 1997년의 외환위기도 우리 경제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눈앞의 고통과 갈등이 두려워 해야할 일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나라의 국가의사 결정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후진국일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분열과 갈등이 증폭되거나, 아예 영합주의에 빠져 문제 해결을 포기한 채 빈곤과 혼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숙한 사회는 눈앞의 고통이라도 미래를 위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사회다. 눈앞의 갈등과 고통이 두려워 해야할 일을 미루고 외면하는 사회는 미숙한 사회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성숙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만 성공한 국가가 될 수 있다.

이번 이라크 파병안의 국회 통과는 우리 사회의 성숙도와 의사결정 구조의 건전성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고, 절차에 따라 국론이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성숙한 다원 민주사회로 상당히 진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논의과정에서 의견 차이가 감정대립으로 격화되고 심각한 국론 분열상이 나타난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취약하고 국가의사 결정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타협이 원칙이지, 원칙을 타협해야 하는 제도가 아니다.

따라서 원칙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자기 원칙을 지키면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상대방 하는 소리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그 사람의 말할 자유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언론자유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그 사람들의 말할 자유 자체를 봉쇄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우려할 일이다. 본래 개혁의 이익은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어 장기적으로 나타나지만, 그 부담은 대개 일부에게 집중되는 법이다. 정치개혁, 교육개혁, 정부개혁, 시장개혁, 노사관계 안정 등 우리 사회가 해내야 하는 수많은 국정과제들은 모두 성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추진과정에서 갈등과 저항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이다.

***눈앞 갈등 피하려 미봉 말아야

목소리 큰 이익집단과 압력단체의 눈치나 살피고 국론분열을 우려해 해야할 일을 미루거나 회피해서는 진정한 국가발전을 이룰 수 없다. 시민운동가는 명분과 정서를 주장할 수 있다. 또 이익집단은 국익보다 자기들의 이익을 앞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정서와 이익집단의 요구에 휩쓸리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번 이라크 파병 결정 과정의 진통은 새 정부가 국정운영의 막중한 책임과 국민정서와의 차이를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부문의 국정 개혁에 있어서도 이런 진통이 반복될 것이다.

앞으로도 정부가 이번과 같이 국가 장래와 국익을 위해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계속 유지하기 바란다. 또 이번 일을 계기로 아무쪼록 노무현 정부가 인터넷 게시판 여론이나 운동권 논리, 편향된 이념노선의 굴레에서 벗어나 국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고 역사 앞에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는 실용주의 정부로 자리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金鍾奭(홍익대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