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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자만이 웃는다, 불 꺼지지 않는 R&D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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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표 기업들이 경기 침체 속에서도 선제적 연구개발(R&D) 투자로 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다. t삼성전자는 올 1분기에만 R&D 투자 비용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6% 증가한 3조8775억원을 집행했다. 삼성전자 연구원이 경기도 기흥 공장에서 LED 소자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삼성]

이달 19일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산기협)가 의미있는 수치 하나를 발표했다. 국내 기업이 운영하는 기업부설 연구소 수가 3만개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1981년 7월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신고제도’가 시작돼 53개 기업 연구소를 정부가 인정한 후 33년 만이다.

 국내 전체 연구개발(R&D) 지출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1년의 56%에서 2012년 75%로 크게 높아졌다. 기업의 R&D 인력도 2012년 기준 27만5000명으로 국가 전체 연구원 수의 68.7%를 차지한다. 이제 한국의 R&D를 받치는 중심축이 국가에서 기업으로 이동한 셈이다.

 산기협이 최근 국내 기업의 올해 R&D 투자 계획을 조사한 결과 올해 기업들은 지난해보다 12.7% 늘어난 59조5075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라고 응답했다. 전체 매출액 전망이 1969조8592억원 정도여서 올해 처음으로 R&D 비중이 매출액의 3%를 넘어서는 것이다. 매출액에서 R&D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2%를 기록한 이래 매년 증가해왔다.

 R&D 투자가 위기에 기업의 체력을 키우는 일임은 자명하다. 미국 코닝은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에 기대를 모았던 광섬유 사업이 부진해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110달러 대의 주가가 1달러로 폭락했고, 12개 공장을 폐쇄하고, 전 직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2만5000명을 감원해야 했다. 하지만 R&D투자는 뚝심있게 유지했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중을 2000년 11.6%에서 2001년 15.1%로 오히려 늘렸다. 그 결과 글로벌 액정(LCD) 유리 기판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며 1위를 고수 중이다. 코닝은 투자액의 70% 가량은 5~10년 안에 결과를 볼 수 있는 단기 연구에, 나머지 30%는 10년 이상의 중장기 연구에 투자하는 ‘인내 자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 삼성전자가 선제적 투자에 나선 것,그리고 현대차가 주요 글로벌 자동차 업체 중 유일하게 R&D 투자를 늘린 것이 현재 두 회사와 다른 경쟁 업체의 명암을 가른 승부수였다. 이런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올해 경기 침체가 계속되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R&D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선제적 R&D 투자로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R&D 투자금액이 2011년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어선 이래 해마다 투자를 늘려, 지난해엔 14조7800억원에 달했다. 삼성전자 연간 영업이익(37조 원)의 약 40%에 달하는 규모다. R&D인력도 전체 직원수(28만 명)의 4분의 1 수준인 6만9300명에 달한다. R&D는 이건희 회장이 그룹 경영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이 회장은 올 초 신년사에서도 “연구개발센터를 24시간 멈추지 않는 두뇌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직접 연구뿐 아니라, 학계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최근 그룹 차원에서 삼성미래기술재단을 세우고 1조5000억원의 R&D 펀드를 조성해, 10년간 기초과학과 소재·정보통신기술(ICT) 융복합분야의 국내 연구자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현대차 그룹은 전사적 투자를 통해 친환경차 시장에서 2020년까지 글로벌 선두 업체로 도약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현대차는 지난달 ‘투싼 수소연료전지차’를 국내에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주요 지방자치단체에 40대를 공급할 계획이다. 양산 체계 구축 계획이 벤츠·GM·도요타 등 글로벌 경쟁사보다 1년 이상 빠르다. 국내 200여 협력사와 협업을 통해 개발, 전체 3만여 개의 부품 중 95% 이상을 국산화했다. 올해 기아차 쏘울EV(전기차)와 내년 현대차 쏘나타 플러그인하이브리드를 내놓는 등 친환경차 라인업도 강화한다.

  LG전자의 R&D 투자는 2010년 2조6781억원에서 지난해 3조5460억원으로 32% 늘었다. 매출액에서 R&D 투자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5.1%에서 6.1%로 높아졌다. LG전자는 현재 국내에 운영 중인 연구소만 30여개에 달한다. 최고경영자가 R&D를 직접 챙긴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2011년 취임 이후 해마다 R&D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는데, 최근에는 “R&D할 시간도 부족한데, 보고서 작성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지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SK그룹 상장사 15개사의 수출액이 지난해 내수를 넘어선 것은 신개념 R&D가 효과를 발휘한 때문으로 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다량의 염분이 함유된 원유에서 소금기를 빼는 ‘유수 분리 기술’, 극한 지역에서도 일정 수준의 끈적이는 점도를 유지하는 ‘초고점도지수 윤활기유’ 제조공정 개발 같은 기술들이다. 무공해 석탄에너지, 이산화탄소 자원화 등 녹색 기술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효성은 지난해 R&D에 전년보다 9.7% 늘린 1570억원을 투자했다. 탄소섬유와 폴리케톤 등 신소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폴리케톤은 일산화탄소와 올레핀으로 만든 신소재로 나일론 대비 충격 강도는 2.3배, 내화학성은 30% 이상 우수하다. 탄소섬유는 무게는 강철의 4분의 1 정도로 가볍지만 강도는 10배 이상 강한 고부가가치 소재다. 탄소섬유는 지난해 5월부터 전주 친환경복합산업단지에서 연산 2000t 규모로 생산 중이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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