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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新중년의 이 몹쓸 사랑!] 천박함 뛰어 넘는 해방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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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그녀와 그, 학교 앞 선물가게 주인 아줌마와 대학교수 간에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불륜, 외도, 바람…. 그런 삿된 단어를 벗어날 도리가 없는 관계다. 그런데 왠지 억울하다. 꼭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천박한 용어로 덧칠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사태가.

놀랍게도 애인 많은 그에게 멀쩡한 가정이 있었다.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극진했고, 매사 남편이자 아빠 위치라는 걸 조금도 잊지 않았다. 번잡한 그의 여자관계와 가족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그냥 이해가 됐다. 그는 제도와 관습의 굴레를 못 견디면서 동시에 그걸 벗어난 티를 내는 것 또한 내보이고 싶지 않아했다.

역시 교수인 그의 부인 또한 전통적인 아내상과는 거리가 멀어서 남편에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 공부에 몰두하느라 남편의 이면생활을 모르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표면적으로 아주 규범적인 가장이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지하실 같은 사생활을 동시에 누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오후여야 한다. 원래 연애가 출발하는 세팅이 통속적으로 그려질 때 늘 그렇다. 정말로 그날 늦은 오후에 비가 내렸고 우산도 없이 흠씬 젖은 그가 가게 문을 밀치고 들어왔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건을 내줬다. 수선스레 머리를 말리던 그가 뗀 첫마디가 이랬다. “가게 문 좀 닫읍시다.” 그녀는 마치 해야할 일을 하는 듯이 문을 닫아걸었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고 클래식 FM의 볼륨을 약간 높였다.

비 내리는 오후 그녀의 가게에서…

‘투 메이크 어 롱 스토리 숏(to make a long story short)’. 그가 자주 사용하는 관용구다. 줄여 말해서, 짧게 말해서, 정말로 두 사람 관계의 시작과 전개를 ‘투 메이크 어 롱 스토리 숏’ 해서 말하자면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지듯이 자연스레 흘러갔다. 비 내리는 그날 머리를 말리고 나서 서해 무의도 앞바다에 조개구이를 먹으러 갔고 또 다음날 일찍 만나 노닥거렸고 그날 저녁에 곱창구이집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 처음 손을 잡고 키스까지 이어졌는 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놀라와 하면서도 마치 익숙한 사람인 양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결혼하고 다른 남자와 처음 해보는 데이트라는 것도, 그러고 싶은 욕구에 차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걸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그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별로 끌리는 외모가 아니라는 것도, 싸구려 실비집만 다니며 돈을 쓸 줄 모르는 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의 방식이 있었고 그녀는 하나하나 적응해 나갔다. 두 사람을 잇는 가장 중요한 끈은 대화였다. 그는 세상의 온갖 소소한 것에 대해 독특한 어법으로 말하기를 즐겼고 그녀는 듣는 일이 좋았다. 하지만 좋기만 했고 자연스럽기만 했을까.

한 남자의 애인이 됐다는 자각이 든 것은 첫 섹스 때였다. 그런데 그 처음이 참 기묘하고 애매했다. 가게문을 닫고 안에 둘만 있거나 그의 오피스텔에 가 있을 때 언젠가는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 예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의 행동은 더뎠다. 마침내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우리 하자!” 그녀는 아주 어렵게 응답했다.

“결혼하고 전 다른 일이 없었어요. 그런 거 없이 만날 수 없나요?” 그가 씩 웃으며 답변했다. “그래, 그러지뭐.”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 혼자할 거다. 봐.” 이후부터의 상황을 묘사하면 포르노가 될 것 같아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그는 그런 행동을 했고 그녀는 지켜보는 것으로 거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반복되던 어느 날 결국은 그녀 쪽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그의 진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직접 하지 않아도 기분만나면 좋다는 말이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유혹의 고등기술이었을까. 어쨌거나 두 사람 관계는 전형적인 유부남 유부녀 불륜의 모습을 갖췄다.

그녀가 부닥친 난관은 남편이나 아이들 문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정사는 더 열성을 부려 탈 없이 유지됐다. 문제는 그와 만나는 내내 언제나 떠나지 않는 두 가지 먹장구름이었다. 첫째, 왜 그가 나를 만날까 하는 의문이다. 별로, 아니 전혀 지적이지 않은 그녀로서는 그가 갖는 관심사와 화제를 따라갈 도리가 없다.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시각은 늘 여론과 달랐고 취미생활인 미술품 감상은 지루하고 막연하기만 했다. 그의 관심사에 동참하기 힘든 자신이 초라해지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도대체 왜 그는 나를 만나는 걸까.

두 번째 문제는 정말로 심각했다. 그의 애인이라는 자각과 함께 동시에 덮쳐온 것이 질투였다. 무시로 그의 핸드폰을 울리는 문자나 전화는 여자에게 온 것이다. 표정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자유로운 지성인 바람둥이를 애인으로 뒀다면 감수할 일이라고 다독여봤지만 도무지 질투심은 억제가 되지 않았다. ‘두 번은 웃고 한 번은 화내고’ 그가 그녀에게 지어준 별칭이다.

정말로 그랬던가. 그가 말하길 그녀는 언제나 두 번째까지 아주 명랑하게 만나고 세 번째에는 꼭 여자문제를 추궁하며 화를 낸다는 것이다. 화내는 그녀에게 쩔쩔매는 그가 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왜 나 한 사람만 만나며 살 수는 없는지 그녀는 궁금했다. 핸드폰 잠금해제 번호와 e메일 비밀번호를 기필코 알아내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녀는 비참해 했다. 그러는 자신이 비참했지만 그런 행동을 멈출 수가 없어서 다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부장 남편과 바람둥이 애인 사이에서

그녀의 삶은 복잡하면서 또한 단순하다. 삼시 세끼 따박따박 챙겨먹는 가부장 남편과 끼니 때우는 것조차 자유로운 바람둥이 애인 사이를 오가며 일과는 늘 분주하다. 아이들은 큰 말썽 없이 자라주고 선물가게 매상은 언제나 그 타령이지만 그러려니 해도 된다. 남편있는 여자가 어떻게 애인을 만날 수 있는지 신기해 했던 예전의 자기가 낯설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남편은 똑같은 모습일 테고 그 또한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동시에 나한테 집착을 할 것이다. 간혹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뭐가 잘못됐다는 거지?’하는 반문이 곧장 튀어나온다. 그녀는 행복하거나 불행한 어느 쪽이 아니라 그저 자기 삶이 좀 더 넓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김갑수 시인ㆍ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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