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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급변한 소비 형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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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식탁 한가운데의 전기 남비엔 쇠고기 찌개가 끓고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굴비와 김치·산나물 등 여섯 가지나 되는 반찬이 입맛을 돋운다.
일곱 식구 앞엔 저마다 흰쌀밥이 놓여 있다.
강원도 춘성군 동면 지내리 이기열씨(38)집의 지난달 23일 저녁밥상이다.
이씨 부부를 비롯, 부모·세자녀가 저녁을 먹으며 때마침 방영되고 있는 TV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잡곡밥은 맛으로>
전체 농촌의 생활이 이씨네처럼 모두 유족한 것은 아니지만 농촌의 변화는 농민들의 의식 생활과 가정마다 파고 들어가 있는 가전제품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소득의 향상과 함께 그들의 소비도 현저히 변하고 있다.
이씨는 가끔 맛으로 옛날의 조밥이나 감자밥을 해먹는 경우는 있지만 요즘은 사철 쌀밥에 1주일이면 2∼3번 육류를 사다 먹으며 어물도 자주 먹는다고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산골인 이곳 마을의 주식은 감자나 밥에 김치와 산나물·된장찌개 등 자급자족의 형태였다. 고기나 과실은 제사날이나 명절이 아니면 구경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마루에 있는 찻장에는 「코피·세트」2벌과 「맥스웰·코피」·홍차에 「프리마」까지 준비되어 있다.
「코피」나 홍차는 매일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손님이 찾아오면 「코피·포트」에 물을 끓여 함께 마시는 손님 접대용이란다.
77년 농협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동안 농가에서 돈을 주고 사들인 생활 용품 및 식품류는 호당 37만6천6백원이며 이중 식품류가 13만9백원으로 34.8%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한 농가가 자급 식품 이외에 월1만원 이상을 식생활에 소비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는 자급자족의 식생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농촌이 이제 주요한 식료품 구매 시장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춘성군의 한 공무원은 예전엔 농민들이 좋은 것은 내다 팔고 나쁜 것을 먹었으나 요즘은 그 반대며 대부분의 농가들의 집에서 먹을 것은 따로 심어 수확이 적더라도 농약을 쓰지 않고 재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의 재산은 논3천평, 밭4천평의 중농. 매년 밭에선 잎담배를 해 1백여만원, 논의 벼에서 1백여만원, 그 외 2마리의 소와 간이 작물로 40만원 등 2백4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먹을 것 따로 재배>
이씨는 자녀들이 이제 장남이 중학을 다녀 교육비가 들지 않아 좀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씨 집의 변화는 식생활뿐 아니라 의생활에서도 현저하다.
가족마다 외출복은 물론 내의와 「스웨터」가 3∼4벌씩 된다.
이씨의 어머니(58)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남이 입으면 그렇게 부러웠던 털「스웨터」가 5벌(겨울용3벌·춘추용2벌)이나 된다며 자랑이다.
예전엔 양말에 구멍이 나면 몇번씩 기워 신어야 했고 한벌뿐인 겨울 내의는 세탁을 하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외출복이 없는 청년들이 나들이를 할 때면 체격이 비슷한 장가간 친구의 예복을 빌기가 일쑤.
대구시 중구 동성로의 P양복점주인 김모씨(48)는 요즘 도시인은 기성복을 많이 사입는 반면 농촌의 고객이 부쩍 늘어 40%가 농촌 고객이라고 말한다.
요즘 농촌은 또 가전제품의 홍수 속에 생활의 편의를 찾고 있다. 집집마다 전기밥솥이 있고 TV·냉장고에 전화 보급율이 도시를 뒤쫓고 있다.
경북 의성군 의성읍 안에는 우리나라 유수의 전자제품 「메이커」의 대리점이 4개나 있다.
전자 대리점 주인 손진순씨(48)는 봄이 되면서 냉장고의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여 본사에 50여대를 주문해 놓고 있다고 했다.
경북 경산군 진량면 보인1동의 경우 52가구 중 전화가 있는 집이20가구, TV33가구, 냉장고5가구, 세탁기가 있는 집이 3가구나 된다.
충남 대덕군 진잠면 학하리의 경우도 85가구 중 TV75대, 전화32대, 냉장고6대가 있으며 예로부터 가난한 마을로 유명한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지등마을도 「라디오」와 전기다리미가 없는 집이 없으며 TV가 26대, 냉장고 1대가 들어갔고 전기밥솥 있는 집이 30가구나 된다.
도내 농가중 80%이상이 전기밥솥을 갖고 있다는 강원도 김형배 부지사는 이제 TV나 냉장고 등 고급 가전제품은 더 이상 도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농촌에 이 같은 가전제품의 홍수를 이룬 것은 전화사업 덕분.
그러나 일부 농가에선 『옆집에서 사니 우리도 사자』며 무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전북 부안군 백산면 S부락의 한 노인(64)은 『모두 냉장고가 좋다며 지금까지 40가구중 4가구가 냉장고를 샀지만 항상 싱싱한 것을 먹을 수 있는 농촌에서 냉장고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부녀자들의 경쟁심을 나무라기도 했다.

<소망은 교육 저축>
이 노인에 따르면 지난해 추수 후 한집이 냉장고를 사니 다른집 부인이 『우리 집이 저집보다 전답이 많으니 우리도 사자』며 남편을 졸라 저축해 밭을 늘리려던 남편이 저축을 포기하고 냉장고를 산 경우도 있다는 것.
농촌의 소득이 높아진 반면 공공 문화 시설은 거기에 균형을 못 맞추고 있다.
인구 10만3천28명의 경남 함양군의 경우 공공 문화 시설이라고는 도서실·극장·문화원이 각각 1개씩 있을 뿐 다른 여가 시설은 한곳도 없다.
이는 전군이 비슷한 실정이다.
소득이 높아진 농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녀 교육을 위한 저축과 농토를 더 마련하는 것.
전북 완주군 조촌면 부동마을 최남진씨(44)는 지난해 1백88만원의 소득을 올렸는데 농토를 더 마련하기 위해 우선 송아지 2마리를 사 기르겠다고 말했다.
농촌의 소비생활이 도시화되어 가면서도 농촌 사람들이 도시를 아직껏 동정하는 것은 역시 도시적 문화시설(학교·병원을 포함)이 뒤져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하는 사람이 있다. 【박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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