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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박근혜의 눈물과 오바마의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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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미국 대통령의 재난연설에는 오래된 공식이 있다. ‘짧고 굵게’가 최대공약수다. 대표적 성공사례인 레이건의 챌린저호 참사 연설은 4분을 넘지 않았다. 재담꾼인 클린턴의 오클라호마시티 테러 연설조차 9분에 불과했다. 국민의 감정선을 건드리기 위한 또 하나의 숨겨진 공식은 연설 초점을 대통령 자신이 아니라 철저히 희생자에게 맞추는 것. 그러나 이 신화의 절반은 2011년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깨졌다.

 오바마의 애리조나 총기난사 추모 연설은 30분을 넘었지만 대단했다. 그는 총탄에 희생된 9살 소녀의 이야기를 꺼내다 말을 잃었다. 이를 깨물고 깊은 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슬렀다.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보며 51초 동안 침묵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진실을 전한다. 뉴욕타임스는 "오바마의 재임 기간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 썼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대국민담화가 일주일 넘게 여진을 이어가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사과는 짧고 눈물은 길었다”고 비난했다. 일부는 “기존에 나온 대책들의 종합 선물세트”라며 헐뜯는다. 담화가 25분을 끌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이라이트는 박 대통령이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다.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계속 화면을 응시했던 장면은 강렬했다.

 야당의 ‘정치쇼’ ‘악어의 눈물’이란 반응은 당연하다. 부동층을 흡수할 자체 동력이 안 보이니 반사이익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야당의 과민반응에는 ‘박근혜의 눈물’에 대한 두려움이 어른거린다. 박 대통령은 2004년 탄핵 역풍을 맞고 침몰하던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나서 "마지막 기회를 달라”는 눈물의 TV 연설로 침몰하던 당을 살려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의 파괴력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눈물을 믿어주고 싶지만 그 진정성이 확인되기까지 좀 더 지켜보겠다는 게 우리 사회의 분위기다. 새 총리 지명, 국정원장과 청와대 안보실장 사퇴 등 발 빠른 후속조치에도 유권자들은 가만히 지켜보며 신중한 입장이다. 어쩌면 단지 세월호 참사의 상처를 어루만져 달라는 게 아닐지 모른다. 인물 교체를 넘어 더 근본적인 변화까지 주문하는 느낌이다.

 돌아보면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나홀로’ 리더십을 구축해 왔다. 장관들은 국무회의에서 받아쓰기만 했다. 그 빈약한 밑천이 세월호 사태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런 강력한(strong) 리더십보다 위대한(great) 리더십에 목말라하고 있다. 권력은 쥘수록 작아지고 나눌수록 커진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정치인의 자세는 낮을수록 좋다. 만약 박 대통령이 청와대 앞에 몰려온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직접 만났으면 어땠을까. 지난 4월 청와대 민원실까지 찾아온 안철수 새정치연합 대표를 선뜻 대통령 집무실로 맞아들였으면 어땠을까.

 오바마의 침묵이 돋보인 것은 평소 그의 매끄러운 말솜씨와 대비된 덕분이다. 위대한 연설가는 침묵의 힘을 안다. 박 대통령의 눈물은 2%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 진정성이 국민의 마음을 흔들려면 기존의 이미지를 뒤집는 반전이 절실하다. 박 대통령 스스로 내각·새누리당과 권력을 나누고 야당까지 끌어안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런 게 ‘정치쇼’라면 ‘정치쇼’는 결코 손가락질받을 대상이 아니다.

 ‘정치쇼’라면 영화배우 출신의 레이건을 따를 인물이 없다. 그에게 민주당의 오닐 하원의장은 눈엣가시였다. 온갖 예산과 법률안에 퇴짜를 놓았다. 그럼에도 레이건과 백악관 출입기자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 “만일 귀하가 천국행 티켓 한 장을 얻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기자)” "바로 찢어버리겠다(레이건)” “아니 왜 그 귀한 티켓을?” “오닐과 같이 가고 싶은데 함께 갈 수 없지 않은가….”

 오늘날 레이건은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고, 오닐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빈말이라도 이 땅에도 이런 고급스러운 정치쇼가 펼쳐졌으면 한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