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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오늘의 교육풍토를 총 점검한다|수학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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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해 6월 서울로 수학여행을 했던 경북 H여고 2년 K양(17)은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거리구경을 나서다 기겁을 했다. 2박3일 예정으로 K양 일행이 묵고 있는 곳은 사창가로 소문난 서울 중구 양 동 서울역 앞의 Y여관이었다.
그나마 일행 3백여 명은 방 1개에 14명씩 투숙했는데도 방이 모자라 맞은편의 D여관에 분산 수용됐다.

<밤새껏「섰다」판>
여관 골목 양쪽에 자기 또래의 소녀들이 엷은 속치마바람으로 짙은 화 강을 한 채 진을 치고 길가는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K양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고모 K씨(40)가 교감을 비롯한 인솔교사들에게 항의한 결과 학교측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여행사 측의『싼값에 좋은 여관을 소개하겠다』는 말만 믿고 사전답사도 않은 채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여관주인(63)은 학생1인당 하루 1천1백원씩인데 아침·저녁 식사를 거의 식당에서 사다 줘야 하므로 남는 것이 없다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는 경우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윤락가에 멋대로 투숙시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지난해 10월 서울에 왔던 경남 S중 2년 생들은 귀향 길에 모두 풀이 죽어 있었다.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자.
B군은 남산 어린이 놀이터에서 껌 1통을 사고 5백원 짜 리를 내밀었다가 20대 껌팔이가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는 통에 거스름돈은커녕 매 맞을까 두려워 총총걸음으로 여관으로 돌아섰다.
C군(l5)은 창경원 구경을 하다 동생에게 선물을 사려고 준비했던 3천 원을 몽땅 소매치기 당했다.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과자 값을 물어 보던 J군은『촌놈이 사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값만 물어 보느냐』는 표독스러운 가게점원의 대꾸에 울상을 짓고 말았다. 대략 이 같은 것들이었다.
즐거운 서울 여행이 부푼 마음으로 출발한 어린 학생들에게 가슴아픈 추억만 남겨 줄뿐이었다.
지난해 가을 서울로 수학여행은 전북 E고 2학년 학생들이 구경을 나서는 동안 몇몇 학생들은 여관방에 그대로 남아「섰다」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지난 밤새 한「섰다」를 계속했던 것. 이중 돈을 몽땅 잃은 C군은 팔목 시계를 여관주인에게 잡히고 5천 원을 빌기까지 했다.
결국 C군은 그 돈마저 다시 잃고는 그날저녁 술을 마시고 여관 유리창을 깨는 등 행패를 부려 여관주인의 고발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교사들이 통사정하고 각서를 쓴 후에야 C군은 풀려날 수가 있었다.

<교사는 따로 행동>
설악산에는 봄·가을로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몰려든다.
이들은 대체로 한 방에 10여명씩 콩나물시루 같은 여관신세를 지는 반면 인솔교사들은 별도로 여관을 잡거나 독방을 쓰는 등의 비뚤어진 행동을 가끔 보게 된다.
지난해 6월 W고 2학년 학생들이 교장 인솔하에 설악산에 왔었다.
교장과 교사들은 학생들과는 별도로 관광「호텔」에 묵으면서 저녁마다 주연을 벌이는 바람에 학생들까지 덩달아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려 말썽을 빚기도 했다.
선생들이 단속을 해도 자칫 탈선하기 쉬운 관광지에서 선생들이 술을 마시고 학생들을 돌보지 않았으니 학생들이 멋대로 행동한 것은 누가 감독을 했어야 하나.
얼마 전 경북 K고 학생들은 설악산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도중 교장부부의 호화판여행에 항의, 영주 역에서 귀가를 거부하는 농성을 벌여 도 교위가 진상조사에 나서기까지 했다.
이처럼 수학여행은 교육적인 효과보다는「역효과」내지는 부작용이 많아 서울을 비롯한 충북 등 일부지역 교위에서는 최근 학생들의 장거리여행을 억제하고 있다.

<사적지가 바람직>
수학여행이「탈선수업」의 현장이 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나 지도감독을 소홀히 해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단면만을 걱정하는 「단견」 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자매결연」이나 또는「초청」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낙도·벽지 국민학생들의 서울「나들이」도 심심치 않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남 S섬의 한 중학교 교사는 수학여행을 꼭「서울」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현충사 등 사적지나 국보급 사찰 등지가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서울의「화려함」에 현혹돼 어린 마음에 막연한 동경심만 불러일으켜 엉뚱한 사고를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했다. 자칫「향토애」같은「정서감정」을 잃어버릴 우려가 많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교사는 서울의 수학여행은 숙소선정에서부터 관광안내에까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여관비 정도로 숙박할 수 있는「유드·호스텔」등을 보다 많이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교육연구소장 오기형 교수는 집단수학여행「시즌」을 봄·가을로 잡아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지도교사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학생이란 신분을 고려해 교육상 효과가 있는 지역을 골라 여행해야 하며 숙소선정 문제 등은 관계당국이 직접 개입해 선정해 주는 등 계도활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관광객 행동도 문제>
수학여행이 비교육적인 요소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건전한 방향으로 권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수학여행뿐 아니고 수학여행이나 관광객들이 몰리는 관광지에서도 학생지도는 심각한 문제라고 관광지의 어느 여자중학 교감은 지적했다.
내외관광객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감수성 예민한 젊은 학생들을 자극하게 되고「호텔」 「비어·홀」「카바레」등 관광업소가 주택가와 분리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현장교육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관광지에서의 교육은 자칫 ▲윤리관이나 정서를 불안하게 만들고 ▲국적 있는 시민정신을 해칠 우려가 있으며 ▲학습의욕까지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결국 관광지로 떠나는 것이나 관광지에서의 교육은 보다 세밀한 계획과 철저한 감독을 필요로 하게 했다. <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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