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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체계 갖춘 연구저작 나와야 할 때"|대담을 통해 본「3·1운동의 사료 정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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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1운동이 일어 난지 60년. 지금 우리가 겨레의 정신적 표상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동안 국내외에서 발굴된 허다한 기록들은 어떻게 정리돼 가고 있는가. 그때 우리 민족이 가다듬었던 이상과 지표를 되새겨 보기 위해 신용하 교수(서울대·사회 사상사)와 윤병석 교수(인하대·현대사)의 대담을 정리해 본다.

<3·1운동 재평가>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남에게 흡수될 수 없는 뚜렷한 존재라는 실증과 건국의 역량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비약적 발돋움이었다.
3·1운동을 계기로 그 이전의 소집단으로 움직였던 수많은 독립 운동이 전 민족적 맥락을 갖게 되며 온 민중이 독립을 지향하는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따라서 활동무대는 전세계에 미칠 만큼 비약돼 일제의 어떤 탄압도 이를 막을 수 없는 정도가 됐다. 중국·미국·노령 등에서 각각 또는 국내와 긴밀한 유대를 만들면서 한민족의 정부형태까지 갖추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3·1운동은 한국 독립의 보장을 받아 낸 뜨거운 절규의 민족함성이었다. 직접적 계기로 삼은「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사실 당시의 우리 민족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것은 1차 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를 위한 원칙이었을 뿐 승전국이었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우리는 그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UP통신이 전세계에 보도한 우리 민족의 독립 요구선언은 일본이 패전국이 되는 경우 자동적으로 해방될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2차 대전 종전처리 과정에서 한국 대표 없는 국제회의의 어느 곳에서나 한국 독립은 당연한 것으로 논의된 것도 3·1운동이란「보증 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 후「파리」강화 회의에 김규식 등 대표를 보내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독립 필요성은 그후 국제 사회에 새롭게 인식됐다.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 기자「나대니얼·페이퍼」는『일제가 한국을 어디까지나 손아귀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나 이와 반대로 한민족이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결심은 결코 일제의 그것만 못하지 않다. 일제는 한 민족을 통치할 능력이 전무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도 이제는 저「발칸」반도·「터키」·중국과도 같이 세계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로 세계 무대에 올려졌다』고 전세계에 전했다.
한편으론 3·1운동이 계기가 꽤 독립운동이 무장투쟁 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때까지 만주 중심의 독립군은 극히 미미해 3개의 무관학교가 겨우 장교를 양성했을 뿐 사병이 없어서 군대 편성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이에 참가했던 청년들이 속속 만주로 몰려 주력을. 이루어 독립군이 대대적으로 편성되면서 무장투쟁은 본격화했다. 청산 리 대 승전 등 20년대의 대일 무장투쟁은 모두 여기에 연유한다. 멸망하지 않는 독립군의 존재는 언젠가 한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기간 자료집>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시발점을 이룩한 3·1운동임에도 실제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가 없는 실정. 숱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고 단편적 연구가 되고 있긴 하지만 사공의 막중 성에 비해 연구 체계화가 뒤져 있는 것이다.
자료는 거의 나온 셈이다. 아직 부족하다면 노령에서의 활동 상인데 이는 소련이 공개치 않고 있으므로 멀지 않은 장래에 입수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그동안 나온 자료집은 국사편찬 위원회의『한국 독립운동사 자료』(5권) 와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가 재판기록과 일본 관헌 보고서를 모은『3·1운동사 자료집』(2권), 연세대 추헌수 교수의『자료 한국 독립』(5권), 그리고 최근 국회 도서 판이 낸『한국 독립운동사료』등 이 방대한 규모의 것들이다.
일본에서 나온 2종의 자료집은 발췌 본에 불과하고 그밖에 김정주의『조선 통치 사료』 (10권)가 있다.
3·1운동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들이 남긴 자료도 많다. 상해 임시 정부는 1919년 9월 안창호 총재·이광수 주필로 편집 위원회를 구성,『한일 관계 사료 집』(4권)을 냈는데 대부분이 배경이고 제4권에서 3·1운동을 다뤘다. 박은식의 『한국 독립 운동 지 혈사』(2권)는 그것과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하와이」중심의 독립 운동 자들은「호놀룰루」에서『대한 독립정전기』를 냈고 상해에서는 여운형·김규식 등의 신한 청년단이『신한 청년』을 발간했다. 둘 다 3·1운동에 관한 움직임과 선언서·논설문을 싣고 있다. 33인 중 상해로 망명했던 김병조는『한국 독립운동사략』을 내놓았고 최 린·신석구가 자서전을 남겼다.
해방 후에도 손병희의 비서로 있던 이병헌이『3·1운동 비 사』를, 운허 스님(본명 이학수)과 김승학이 주동으로「애국 동지 원호회」에서『한국 독립운동사」『3·1 운동 편』을 발간했다. 김승학은 또『한국 독립 사』를 저술했고 장도빈이『3·1운동사』를 썼다.
이용락의『3·1실록』은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군·면별로 3·1운동을 정리한 답사기. 체험담을 청취한 생생한 자료집이다.
이밖에도 외국의 신문·잡지, 그리고 상해서 발간됐던『독립신문』,「필라델피아」에서 낸 『한국독립』등 이 이제 평가 정리되어야 할 자료들이다.
『3·1운동 논총』(동아일보사)과『3·1운동사』(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의 2종도 자료집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이제 민족적 차원에서 본격적인 저작물을 기획, 간행하는 일이 시급하다. <정리=권순용 기자>

<대담>
진용하 교수<서울대·사회사상사(우)>
윤병석 교수<인하대·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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