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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기자 종군기] 곳곳에 이라크 탱크·대포 잔해 널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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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일 오후 11시(현지시간). 여기는 카르발라 북쪽 20㎞. 바그다드까지는 70㎞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배속된 5군단 16전투지원단의 선발보급부대는 미 보병 제3사단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이젠 정말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

이곳에서 3사단은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라크군의 탱크.대포 등이 연기를 피워올리며 불타고 있었다. 무엇이 타는지 지독한 악취가 진동한다. 전쟁의 냄새다.

에이브럼스 탱크와 험비 지프 등 모든 미군 차량은 참호 속에 들어가 있다. 이라크군의 야포.미사일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다. 녹색군복을 입은 이라크군 포로 아홉명이 둥근 쇠철조망에 갇혀 있다. 일부는 누워서 쉬고 있다. 비교적 느긋한 표정이다.

이날 오전 기자는 16지원단의 181대대 515중대와 함께 나자프 인근의 공급기지를 출발했다. 북상한 3사단에 연료를 공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동 규모는 5천갤런(드럼통 1백58개 분량) 들이 유조차 35대. 중대장 에밀리 호컴 대위는 "1개 전투여단이 여덟시간 쓸 분량"이라고 설명한다. 경제학으로 보면 전쟁은 엄청난 소비행위다.

낙타떼가 걷는 사막을 트럭떼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 병사는 "전장을 누비는 유조차는 폭탄이나 마찬가지"라며 잔뜩 긴장한다.

낮 12시쯤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나자프 근처를 지나갔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하지만 미군 쪽의 잔해는 거의 없다. 대부분 이라크군 것이다. 1차선 외줄기 도로 양쪽으로 이라크 군용차량들이 넝마처럼 내팽개쳐져 있다. 대공포들은 갈가리 찢겨 있다.

벽돌 건물 하나에 터널이 뚫린 듯 큰 구멍이 나 있다. 탱크포를 정면으로 맞은 모양이다. 어떤 건물들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났다. 대공포를 쥐고 있거나 빌딩 속에서 총을 쏘던 이라크군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가 치웠는지 모르지만 사상자는 없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잔해 더미 사이로 개들만 돌아다닌다. 난리통에 주인을 잃은 것 같다.

두어시간쯤 갔을까. 언덕이 나왔다. 호컴 대위는 "쿠웨이트 사막에서 대기할 때부터 이 언덕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각도는 13도밖에 되지 않지만 사막에서는 고지 역할을 할 수 있어 '마(魔)의 고개'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언덕을 놓고 혈전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언덕 위에 이르자 폭탄을 맞아 파괴된 이라크 군용트럭과 무수한 총탄자국이 난 벽돌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카르발라를 2~3㎞ 옆으로 두고 부대는 북진을 계속했다. 좁은 도로는 무기.군수차량으로 가득하다. 체증도 생긴다.

어떤 때 이 행렬은 10여㎞에 달한다고 한다. 보급부대가 도착한 곳은 3사단 4개여단에 기름을 공급하는 MSB(main support battalion). 차량들이 엄마 젖가슴을 물고 있는 새끼 돼지들 같다.

사막에 밤이 내려 앉았다. 손을 뻗으면 별이 잡힐 듯하다. 전투식량을 위(胃)에 보급하고 병사들은 야전침대를 편다. 별 하나 하나에 가족의 얼굴을 붙이다 보면 어느덧 잠에 빠질 것이다. 나도 얇은 슬리핑백을 폈다. 내일 새벽엔 가스 경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른 새벽을 기습하는 가스 경보는 진짜 싫다. 오늘 새벽에도 가스 경보에 슬리핑백에서 몸을 뒤척여 마스크를 써야 했다. 자다가 갑자기 방독면을 쓰다니 달밤에 체조하는 격이다.

이라크 카르발라 북부에서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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