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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비 천재는 고달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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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쏟아지는 박수 갈채 속에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 무대. 짙은 화장으로 한 6세 안팎의 어린이가 부채춤을 추거나 도저히 해내기 어려운 듯한「피아노」곡을 거뜬히 연주해내고, 검은 띠를 맨 꼬마가 맨 손으로 기왓장을 5장이나 깨뜨려도 어른들은 별로 놀라지 않는다. 어린이 무용 경연 대회나 발표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해 10월, 어느 어린이 미술협회가 주최한 미술 대회에서 국민학교 3학년인 아들이 최고상을 탔다는 소식을 듣고 전시장을 다녀온 K씨(42)는 집에 돌아와 대판 부부싸움을 했다.

<학교수업은 포기>
부부싸움의 사연인 즉 부인이 주최측과 유력한 심사위원들에게「인사」를 나누고 소위「정치」를 한끝에 따냈다는 아들의 최고상은 작품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
아들의 그림이 입선작의 수준을 넘지 못해 결국은 바꿔치기가 이루어진 것. 그리고 부인이 이 같은「수고」(?)를 하는데 든 총 경비는 1백50만원정.
「피아노」를 썩 잘쳐 주위에서 많은 칭찬을 받아왔던 국민학교 6학년짜리 B군(13).
그 동안 줄곧「권위」있는 교수로부터 교습을 받아왔고 학교에서는 물론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거의 1등을 독차지해 왔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5학년때 전국에서 손꼽힌다는 이름 있는「콩쿠르」에서는 예선에조차 들지 못했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 후 다음해 6학년 때는 거의 학교수업을 포기했다.
집과「피아노」선생님 댁을 왕복하면서 매일같이「피아노」만을 두들겨 댔다. 어머니가 학교를 드나들면서 손을 쓴 것은 물론 선생님댁을 갈 때에도 반드시 동행을 했다. 『천재를 좌절시킬 수는 없다』는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 결과 6학년 때는 또 다른「콩쿠르」에서 보란 듯이 최우수상을 따냈다.
소위 이름난 경연대회에 출연하게 돼있는「예비 천재」들은 연습 때문에 학교를 나갈 수 없는게 보통이다.
학교측에서도 이를 은근히 권장하는 편. 큰상을 받게되면 그 어린이가 있는 학교의이름도 그 만큼「천하」에 떨칠 수 있으니까.

<유령단체 짝자꿍>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손을 잡아끌고 특수 교육에 열을 올려 어느 방면이고「천재」를 만들어보겠다는 안간힘은 최근에 비롯된 일이 아니다.「아파트」단지마다「붐」을 일으키고있는 태권도 도장이나 미술 교실 모두 어린이반이 가장 활기를 띠게 마련이다.
『이 구두는 사람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지 않아요. 그림을 집에 보내려면 이런 것은 고쳐주어야 할게 아닙니까.』
서울 동대문구 변두리 지역에서 M 미술 학원을 하고있는 0씨(47)는 어느 어머니로부터 호된 항의를 받았다.
『어린이의 그림은 자신의 내면세계가 자유롭게 옮겨지는 것이며…』하는 따위의 설명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등산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외국에서 사왔다는 화려한 빛깔의 등산화가 그 애한테는 가장 멋있는 것으로 보였을는지 모른다는 구차스러운 설명에 가서야 이 어머니는 노기를 풀고 계속 아들 지도를 잘 부탁하더라는 것.
이 같이 그릇된 부모들의「이상 과열」에 편승해 어린이들을 미끼로 돈벌이에만 급급한 각종「어린이 대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교육협회」「△△위원회」「○○연구회」등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단체가 거창하게 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이들은 참가비 또는 작품 출품료를 엄청나게 비싸게 받는 것이 특징.
경기도 I시에 있는 모「협회」는 최근 도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미술학원을 상대로 어린이 미술 작품 추천을 받았다. 해당 어린이의 이름을 명기한 안내장은「예선을 통과했으니 본선에 심사할 작품 2점 이상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따른 출품료는 점당 3천5백원, 국전출품료 5백원에 비해 엄청나다.
서울변두리 어느 시에서 미술 학원을 하고있는 L씨(27·여)『한마디로 상을 팔고 있는 잔치입니다. 어느 정도 수의 어린이를 참가시키면 몇 개의 상을 주겠다는 식으로 협상이 와요. 언론기관이나 몇 개의 사회단체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돈벌이 대회를 열어요. 무더기 참가에 무더기 시상이라고나 할까요.』
엉터리 상장이라도 한 장 받아오면 금방 천재화가가 탄생이라도 한 것처럼 어쩔줄 몰라하는 학부모 또 그래야만 학원을 운영해 나갈 수 있는 현실. 그 줄다리기 속에 티없는 어린이가 말려들고 있다.
어느 저명 여류무용가가 주최했던 무용「콩쿠르」에서 낙선했던 K양(9)의 어머니는 참가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인지 이미 막이 내려진 대회장의「커튼」과 현수막 등을 배경으로「트로피」를 안고있는 딸과 기념촬영을 했다.
「트로피」는 일금 5만원정의 참가상.

<배경만 넣은 사진>
이 사진은 안방과 딸의「피아노」위에 의젓하게 걸려있어 큰상이라도 받은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날씨가 푸근하다 해도 한겨울철인 요즈음 서울 W수영장의 하오 2시에는 30명이 넘는「어린 물개」들로 붐비고 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라면 오죽 좋겠읍니까마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대 선수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에 보내는 아이들입니다』
수영 지도 교사 K씨(28)는 그래도 소질이 없다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한다고 했다.
지도교사들조차 공공연히 말하는 부모들의 허영, 내지는 극성으로 구김살 없이 커야할 어린이들은 엉뚱한「예비천재」란 굴레에 매여 고달프기만 한 것이다. <전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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