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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별 기고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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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도널드 그레그
태평양세기연구소(PCI) 회장
전 주한 미국대사

그때 나는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애였다. 1930년대 얘기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감리교의 스탠리 존스 목사님 설교를 들으러 간 적이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였다. 그때 그분이 했던 말씀이 뇌리에 박혀 지금도 종종 생각나곤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 결핵을 앓고 있어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분 말씀이 어린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갑작스러운 참사로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 사태에 대처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참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승객을 가득 태운 최첨단 제트 여객기가 귀신도 모르게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과적 상태에서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페리가 운항 미숙으로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학교에 난입한 무슬림 광신도들에 의해 수백 명의 어린 소녀가 납치됐다. 터키에서는 탄광에서 일하던 수백 명의 광원이 땅속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참사에 대처하는 정부의 그 어떤 조치나 개인의 영웅적 행동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가족의 슬픔을 완전하게 보상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 삶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는 권한을 가진 정부 당국자들이 취하는 행동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앞서 언급한 네 개의 비극적 참사에 존스 목사님이 말씀했던 기준을 적용해 본다면 그래도 한국이 상대적으로 잘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말레이시아는 여객기의 실종 사실에 당혹스러워하면서 자신들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혹시라도 승무원들의 잘못으로 드러날 가능성을 우려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어린 여학생들의 대규모 피랍 사태에 대한 나이지리아 정부의 대응을 보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겁을 내며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다. 나이지리아에 만연한 부패는 끔찍할 정도의 대규모 인신매매가 창궐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유엔 마약범죄사무국이 전 세계 인신매매의 최대 소굴 중 하나로 지목한 나라다. 이탈리아 홍등가에서 일하고 있는 성매매 여성의 60%가 나이지리아 출신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터키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점들은 어느 면에서 1987년 한국을 연상케 한다. 당시 한국인들의 대대적인 정치적 저항에 굴복해 독재자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과 주미대사를 지낸 고(故) 김경원 박사는 흔히 ‘한국의 키신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9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요크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그중 일부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는 한 번에 한 개씩 벽돌을 쌓듯이 천천히 진행된다. 또 경제적 근대화를 동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민주주의가 불가피해지고, 민주주의가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일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 한국에서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은 한국의 중산층이 더 이상 어린애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시위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완전히 미지수다.

 한국에서는 지금 세월호 침몰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선장과 승무원들에 대해 철저히 책임을 묻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다음 단계는 과적으로 침수와 침몰의 원인을 제공한 책임자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절차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계는 안전 규정을 복원하는 절차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재벌들의 압력에 밀려 안전상의 규제를 풀어버렸고, 이는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됐다.

 김경원 박사가 썼던 표현이 이 지점에서 다시 도움이 될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한 번에 한 개씩 쌓은 벽돌’처럼 경제적 근대화의 토대를 형성했던 일부 규제 조항들을 제거함으로써 한국을 권위주의적인 과거로 후퇴시켰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규제 조항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태평양세기연구소(PCI) 회장 전 주한 미국대사

 ◆그레그 전 대사(86)=1927년생. 51년 윌리엄스 대학 졸업. 31년간 미국 중앙정보국(CIA) 근무. CIA 한국지부장(73~75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외교안보보좌관. 주한 미국대사(89~93년).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93~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