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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단특별기고 인간존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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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2년 이른 봄 몇십「마일」밖에 안떨어진 전선에서는 포탄이 작렬하고 부산거리는 내각책임제 개창논쟁으로 온통 뒤끓고 있을 때, 멀리 「유럽」에서는 제2차대전후 최초의 진사건이 일어났다. 사상처음으로 소련공군중위 1명이 경비행기를 몰고 서「베를린」으로 「망명」해 온 것이었다. 「뉴스」는 곧 전파를 타고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졌으며 미국은 시각을 놓치지 않고 그를 동행해온 하사관1명과 함께 비행기로 서독으로 날았다가 이어 미본토로 데려갔다.

<망명 소장교의 산 교훈>
그 때 나는 일본동경에서 양유찬씨등과 함께 한일회담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사건이 일본의 일반민중, 특히 좌경적인 지식층이나 「매스컴」에 준 위력은 컸다. 소련도 결국은 책에서 보던 천당이 아니라 모순과 갈등투성이의 인간사회라는 사실이 날벼락처럼 그들의 눈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듬해 봄에 나는「하버드」대학 연구실에서서 책에 파묻혀 있있는데 하루는 미국신문에서 그 소련 공군 군인들에 관한 기사를 두번째로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은 전번과는 정반대로 버리고 온 조국으로 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꾸준하게 소련의 기관원이 그들을 설득했고 소련으로 돌아가도 그들의 죄과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확약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깊은 의혹에 빠졌다. 변덕장이라고 가볍게 치워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사람이 한번 목숨을 걸고 결행한 일을 그렇게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인가. 소련기관원이라는 사람들의 설득능력도 대단한 것이로구나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의 궁금증은 그러나 곧 풀렸다. 며칠후 「뉴욕·타임스」의 일서판 부록「매거진」에 그들과의 「인터뷰」기사가 꽤 길게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요점은 이러한 것이었다.
미국으로 망명해온 처음 몇 달동안은 참으로 좋았다. 아무런 구속이 없어 좋은데다가 구경꾼들이 물밀둣 밀려들어 격려도 해주고 금품도 갖다주어 생할도 유족하였다. 그러나 몇달지나는 동안에 구경꾼도 줄고 생활도 궁하게되어 호구지책으로 세탁집 일꾼으로 취직했는데그러고 보니 몸도 고달플 뿐아니라 장래가 불안스러워 못견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말보다도 제일 나의 흥미를 끈 말은 미국에서는 만사를 자기들보고 스스로 판단해 스스로 결정하라니 못견디겠다는 곳이었다. 잘 알 수도 없는 일을 어떻게 우리들더러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이냐. 소련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모든 것을 웃사람한테 맡기고 우리들은 그저 옷사람이 시키는대로 하고만 있으면 된다.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생활상의 불안도 없다. 그래서 자기들은 소련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인터뷰」기사를 읽고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하였다. 우선 그들의 이야기는 소련 기관원이 주입한 것도 미국신문기자가 조작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진심으로부터 나온 것 같아서 나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에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불안이 있다는 말은 미국에 고도의 실업보험제도가 있는 것을 잘 몰라서 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미국과 같은 자유경제체제 아래서는 근로자가 자신의 태만이나 과실없이 일자리를 잃는 수도 있을 수 있는 것이므로 「프라이드」 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불안을 느낄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모든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라 해서 곤란하다. 소련에서는 그런일 없다 하는 말은 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근본에 관계되는 말로서 결코 가볍게 지나쳐 버러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소련군인의 이야기를 내가 오늘날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의 자유로부터 출발해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을 당하든 그 시비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 아무도 그러한 자유를 침범하거나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대원칙 위에 서있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그러면 민주국가의 시민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실제로 모두 가지고 있느냐하면 그것은 꼭 그렇다고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다.

<능력의 차는 어쩔수없어>
아무리 부유하고 문화가 발전된 나라의 백성이라도 능력의 차이는 어찌할수 없는 것이기때문이다. 설사 모든 사람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있다하더라도 이번에는 자기의 판단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양심과 용기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느냐가 또한 문제다. 아무리 올바른 판단을 내렸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면 아무런 실효가 없기 때문이다. -소련군인들은 민주주의의 그러한 허점을 찌른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로 돌아가 살겠다고한 공산사회는 어떠한가. 내가 보기에는 공산사회의 이론과 현실은 민주사회와는 정반대의 괴리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무식하고 억압에 길들여진 백성이라 할지라도 공산치하의 백성들도 사람인 이상에는 저마다 제 나름의 판단력은 가지고 있고, 그 판단력위에 행동하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덮어놓고 상부의 지령대로만 따르라 하니말이다. 그 상부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사람인이상에는 때로는 부정과 과오를 범할 수 있는것 아닌가.
그렇다고 이론과 현실사이의 괴리 또는 거리는 어떤 체제를 취하거나 마찬가지이므로 민주체제를 취하거나 공산체제를 취하거나 별로 상관할 것이 없다는 말이 될 것도 같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인간을 「끌어올리려는」사상임에 반하여, 공산주의는 있는 능력도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을 억압하고 「끌어내리려는」 사상체계이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사람은 동물과 신의 중간적 존재, 또는 동물적 본능과 신적 이성을 공유하는 모순의 통일체로서 동물로부토 신으로, 본능으로부터 이성으로, 불완전으로부터 완전으로, 한없이 먼 길을 걸어가는 곤달픈 나그네라 할수 있는데 이 길이 아무러 곤달파도 화제의 두군인같이 당초의 목적을 포기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먹고 살기만 하는 동물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해서 형성된 사상체계인데 인문은 자유다. 또는 자유로와야 한다고 주강하는 근거는 동물과 달러 인간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금세기로 들어온 이후 자유를 부정하는 사상과 혁명이 크게 일어나고 종말에는 이를 시인하고 추종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나게 된 것은 곧 인간의 존엄성이 도전을 받아 흔들리게 된 때문이라 하겠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하다는 것이었는지, 그것은 그렇게쉽게 흔들릴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한번 근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라 생각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논증이 불가능하고 진화론의 공세앞에 자신의 입지를 방위할 수 없는 한낱 정치적 「슬로건」 이나 종교적 신앙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과학의 발판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학론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성급한 속단 아니면 진화론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능의 지배를 극복>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명의 기원과 최초의 생명이 진화해서 오늘에까지 이르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과정이 너무도 까마득해서 아직같아서는 과학적인관찰과 실험으로 이를 증명하기 불가능하여, 인류와 「아메바」와의 관계는 커녕 인류의 촌격이라는 원숭이류, 그 중에도 특히 인류에 가깝다는 「침팬지」 와의 친척관계조차 이를 해명함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인간과 동물사이에는 도리어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어서 사람은 동물로 격하되기는 커녕 역시 「만물의 영장」으로서 침범당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하게 된 것이다.
나의 말을 뒷받침하기위해 나는 한사람의 철학자와 한사람의 동물학자의 응원을 청하겠다.
철학자 「카시러」는 그의 『인간론』 (1944년) 에서 여러 동물학자들의 연구를 자상하게 추적한 뒤 인간과 동믈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는데, 그것은 언어라는 「심벌」(상징)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의 유무라고 단정한다. 새 (鳥) 도 울 줄 알고 「침팬지」 도 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기때문에 단순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애써 「언어」라는 호칭을 쓴다해도 그것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반사적으로 표출되는 「타감적언어」(emotional language)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앎으로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나아가 문화·종교·예술·역사·과학등의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킬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함을 「카시러」는 강조한다.
동물학자「프트만」의 소설(『인간론』·l944년) 은 한층 자연과학적이요, 직선적이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발육과정을 그 수태시서부터 면밀히 비교 추적하여 양자간의 공통점을 충분히 주의하면서도 인간의 갓난아기의 뇌수가 어른이 된 류인원의 그것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사실로부터 동물은 일생을 통해 환경과 본눙의 지배를 받지만, 인간은 결단의 능력을 가지고 그의 의사로 환경을 지배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은 결단력이 있다>
「포트만」에 의하면 인간행동 중 가장 본능적인 「섹스」에 있어서도 인간은 개별적 결정이라는 자유선택을 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러한 결단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목적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치는 고귀한 행동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더이상 두학자의 소설을 따라가 볼 겨를은 없으나, 이상에 소개한 것만으로도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동물이 아니며, 신앙이나 신념의 힘을 빌지않아도 인간은 존엄한 것, 인간의 자유는 불가침의 것이라 함이 충분히 밝혀진 것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불가능·부가탈의 인권을 가진 인간이 조직하는 인간사회는 일견 비슷한 조직을 가진 개미·꿀벌등의 동물사회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한다는 것을 지적하여 이글의 결론으로 삼으려한다.
개미·꿀벌등의 집단생활은 대단히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하며 그 활동은 정확하고 정밀하여 인간사회보다도 도리어 효과적이어서, 언뜻 생각하기에 말썽많고 낭비많은 인간사회의 모범이 될 법도하다. 질서와 핵심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역사상의 몇몇인물이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를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동물로 끌어내리려는 인성에 역행되는 방향이다.
사람은 각자 개별적 판단위에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류사희의 활동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 같은 것은 사실이요. 더군다나 사람의 의사는 대별하여 기존질서를 존속시키려는 방향과 그와 반대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려는 방향의 두가지로 갈라지는 것이므로 인간사회에는 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사회를 동물사회로 끌어내릴수는 없는 일이다.
동물사회는 아무리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해도 그 곳에는 영원한 반복이 있을 뿐임에 반하여 인간사회는 무질서하고 낭비가 많은듯 해도 바로 그곳애 부단한 문화발전의 원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사회는 단순생(simplisity)에 의해 지배되는데 반해 인간사회는 통일성(unity)에 의해유지되고 있는 것임을 명기하여야 하겠다. 단순성은 개체의 행동의 단순한 일치를 요구하는 것임에 반하여, 통일성은 개체간의 긴강과 마찰을 용인하면서 「헤라플레이토스」의 말대로 「반대물의 조화」위에 성립되는 것이다.
소련은 경비행기를 몰고 자유세계로 탈출했던 두 군인을 길을 잃은 개미나 벌을 회수하듯 회수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2억몇천만의 소련백성이 전부 개미나 꿀벌이 될 날은 결코오지 않을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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