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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로 문명을 비평 영면한 「찰리·채플린」의 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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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뉴욕25일AP합동】「크리스머스」인 25일 88세를 일기로 영면한 「찰리·채플린」옹은 한 시대를 풍미한 「팬터마임」(무언극)의 천재요, 무성 영화시대의 「코미디」왕이었다. 자루같이 헐렁한 바지, 납작한 구두, 일그러진 중산모 차림에다 빨래 솔같이 뻣뻣한 콧수염을 한 채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능숙한 손짓으로 만인을 웃겨주던 그의 자태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코미디」가 광대놀음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을 듣던 시절에 그는 그의 「코미디」에서 희극적인 흥미에다 「페이도스」를 혼합한 독특한 「코미디」를 연출하여 독보적인 지위를 굳혔다.
「채플린」은 「시나리오」작가인 동시 재능 있는 영화배우 겸 감독이었으며 또한 유능한 제작자였다. 그는 40년간의 미국생활에서 백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3번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데다 이혼 후 자녀들의 부양문제를 둘러싼 소송에 휘말려들기도 했으며 공산주의 동조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1952년 그가 영국을 여행하고 있을 때 미국정부는 그가 공산주의에 동조, 미국정부에 위험한 정치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미국 재입국을 금지시켰다.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채플린」은 그의 4번째 부인 「우나·오닐」여사와 함께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스위스」의 한적한 「코르시에」에 마을에 정착했다.
그의 4번째 부인「오닐」여사는 미국의 저명한 극작가였던 고「유진·오닐」의 딸인데 1943년 그녀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4세의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18세였다. 그녀는 「채플린」과의 결혼생활에서 8명의 자녀를 낳았다.
「코르시에」에서 「채플린」은 자서전을 집필했는데 이 자서전에서 그는 자기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비국교도라고 말하고 있다.
1889년4월16일 연극인 부모 사이에서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찰즈·스펜서·채플린」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가 무대에 「데뷔」한 것은 어머니의 팔에 안겨 다니는 유아 때였다.
7세 때부터 그는 연극계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었다.
지난 75년 「엘리자베드」 영국여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 받은바 있는 영국 태생의 「채플린」옹은 노령으로 인한 쇠약 때문에 최근 수년동안 「제네바」 호반에 있는 18세기에 지은 대저택에서 은둔생활을 해왔다.
『골드·러시』 『도회의 등불』 『뉴욕의 왕』 『모던·타임스』 『위대한 독재자』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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