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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의 시대' 연 작은 고리 … 세월호, 이것만 제대로 채웠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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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키스 텐틀링거(左), 컨테이너 결박장치(右)

1955년 어느 날 트레일러 제조업체 기술담당 부사장인 키스 텐틀링거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트럭운송업자 맬컴 맥린이었다. 그는 막 해운회사를 인수해 화물 트레일러를 통째로 배로 실어나르는 서비스를 시작한 참이었다. 육상운송과 해상운송을 통합하는 혁신적인 서비스였다. 하지만 트레일러를 층층이 쌓아 올리지 못해 화물선에 낭비되는 공간이 많았다. 맥린은 텐틀링거에게 문의했고 “분리형 철제 화물박스(컨테이너)를 사용하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컨테이너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은 아니었다. 1951년 덴마크에 목제 컨테이너 전용선이 취항했고 미국 육군은 52년부터 전쟁 중인 한반도에 철제 컨테이너를 사용해 군수물자를 실어날랐다. 하지만 텐틀링거는 다른 이들과 달리 컨테이너 운송의 핵심이 효율적인 결박(結縛)장치 개발에 있다고 생각했다. 컨테이너를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선 트레일러나 화물선에 튼튼히 고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쉽고 빠르게 결박을 풀 수 있어야 옮겨 싣는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텐틀링거는 투박하고 단순한 장치를 만들어 모순된 두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컨테이너 여덟 귀퉁이에 고정용 고리(corner fitting)를 달고, 그 수평면 구멍에 잠금장치(twist lock)를 90도로 끼워 돌리는 방식이다. 선박에 실을 땐 추가로 수직면 구멍에 철제 고박(固縛)장치를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텐틀링거의 아이디어는 대성공을 거뒀다. 57년 시험운항에서 빼어난 효과가 입증됐다. 텐틀링거는 이어 컨테이너용 기중기, 냉장 컨테이너용 전력공급장치 등도 만들었다. 그는 컨테이너 운송시스템의 제도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60년대 자신의 것과 비슷한 유사품이 나돌자 텐틀링거는 맥린의 회사가 갖고 있던 고정용 고리와 잠금장치의 특허를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그 덕에 65년 미국 내 컨테이너의 표준규격이 제정될 수 있었다.

 텐틀링거의 컨테이너 기술은 세상을 바꿔놨다. 국제 화물운송비가 크게 줄어 서구에선 자국 내 생산품보다 아시아산 수입품이 더 싸게 팔렸다. 한국이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룬 것도 컨테이너 도입으로 물류비가 줄어든 덕이 컸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세월호 선원들은 고정용 고리를 아예 끼우지 않은 채 컨테이너를 실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탓에 배가 기울자 컨테이너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결국 침몰했다. 텐틀링거의 결박장치는 바로 이런 일을 막자고 만든 것이었다. 3년 전 그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못지않게 큰 분노와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관수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초빙교수(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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