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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제자 박화성>|<제58화>문예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10)|박화성|「조선문단」5월 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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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년 동안이나 교단에 서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내가 일조에 생도로 변신하자니 거기에 따르는 까다로운 조건이 허다하였다. 노란 구두를 신지 말라, 팔뚝시계를 차지 말라,「슬리퍼」를 끌지 말라, 일체의 화장기를 엄금하라 등등이었다.
그 모든 조건은 하나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건만 열 다섯 살 때 보통학교에서 내게 배우던 2학년생들이 어느 샌지 처녀로 자라나 나와 동급이 되어서『선생님』『선생님』하고 따라다니는 데는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8년 전에 엄연히 내 하급생이었던 아이들이 내가 딴 길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졸업하자 바로 동경여고 사에 진학하여 당당한 여 교원이 되어서 한사람은 지리와 역사, 또 한사람은 가사와 양재의 담당교사로 군림하고 있으니 그 어색한 분위기란 형언하기 어려웠다.『선생님, 이거 좀 가르쳐 주세요』하고 아이들이 달라붙을 때나 지리·역사나 가사시간에 선생들이 들어와 호명하다가 42번인 내 번호 앞인 40번쯤에서 호명을 중지하고 출석부를 내려놓을 때는 와아 하고 웃어대는 급우들의 웃음소리가 교실에 차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기이한 환경에서도 나는 꾸준히 학업에 정성을 다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내 하숙방에 진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정치마 끝에 가느다란 흰줄을 두 번 돌린 진명의 교복을 입은 언니가 서해를 데리고 온 것이다.
『글쎄, 이분이 전에도 집에 한번 오셨드래요. 오늘은 마침 내가 있어서 모시 구 온 거야. 왜 주소도 안 알려 드렸어? 깍쟁이 같으니라 구.』
언니는 설명과 꾸지람을 섞어 가며 수선을 떨었다. 서해는 그 푸른 기가 도는 안광으로 나를 쏘아보며 무언의 질책을 하였으나 이내 호인다운 컬컬한 음성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꽃도 지고 새싹이 돋아 신록의 계절로 접어든 덕이랄까, 그는 회색의 중 차림을 벗어나 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온 모양으로 그가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을 때 낡은 중절모가 반쯤이나 깔려 들어갔다.
(여전히 침착성은 부족하군) 웃음이 터질 듯 하였지만 나는 주인임을 깨닫고 언니에게 과실 등을 사 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서해는「조선문단」5월 호를 가지고 왔다. 그는 이「조선문단」사에서 방인근 씨와 함께 일하며 그 댁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근히 원하고 있던 차라 나는 잡지를 받고 퍽 기뻐하였고 그도 따라 싱글벙글했다.『역시 오길 잘했군요. 그렇지만 오늘은 좀 따질 일이 있어 온 거우다.』
그는 돌연히 웃음을 거두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함께 추천을 받은 임영빈과 한병도(설야)가 이 달에 소설을 발표했는데 왜 나는 가만히 있는 거냐고 따진 후에 자기의 작품도 있으니 읽고 평을 하라는 것이었다.
5월 호에는 김명순이「탄실」이라는 별명으로 쓴『꿈 묻는 날 밤』이 실려 있고 서해의 말대로 임씨와 한씨의 추천 직후의 소설과『박돌의 죽엄』이라는 최의 단편이 발표되어 있었다.
서해는 4월 호에서 내게 공감을 주었던 조운의『봄비』에 대한 칭찬을 하기에 침이 말랐고 또 5월 호에 써낸 운 씨의 시조『법성포 십이경』도 극구 칭 선하면서 내게 많은 격려를 하였다.
그가 돌아간 후에 나는 재빨리 김명순의 것을 읽었으나 도무지 무슨 소린지 해독하기 어려웠고, 임씨는 지리한 풍자소설을 썼는데 한씨의 것은 예술적인 면에 중점을 둔 흔적이 보인 작품이었다.
나는 서해의『박돌의 죽엄』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정열과 집념은『탈출기』보다 못하지만 문장은 그것보다 훨씬 세련되어 있었고 어찌나 호흡이 절박하든지 읽는 동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나는 서글퍼졌다. 남들은(임씨와 한씨를 지적함)추천을 받고 둘째 번의 작품들을 내놓았고 언제나 선배연하는 서해는 월등 나보다 앞서가는데 나는 재수라는 입장에서 아래로는 제자들에게 몰리고 위로는 후배들에게 눌리는 기묘한 현상을 매일 연속하면서 작품하나 못쓰고 있는 이 꼴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억울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어 무심코 책장만 넘기다가 이은상의『흙에서 살자』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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