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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길 개척했지만 잦은 변신으로 오점
1975년 펜클럽 회장 시절의 백철. [중앙포토] 1970년대 중반 백철 평론가가 신문에 1920~30년대 문단 이야기를 연재할 때 한동안 그를 자주 만났다. 내가 ‘꼬부랑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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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19)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 -정지용 국토는 빼앗겨도 민족은 살아남지만 모국어를 잃으면 민족은 소멸된다.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빼앗으려 한 것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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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11)|박화성|합평회
이은상은 12월 호에서부터 조운과 함께 매월 시를 발표하여 나도 더러 읽은 적이 있었는데『흙에서 살자』라는 제목이 맘에 들어 읽어보았더니 과연 동감할 수 있는 시였다. 푸른 풀 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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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문예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10)|박화성|「조선문단」5월 호
7년 동안이나 교단에 서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내가 일조에 생도로 변신하자니 거기에 따르는 까다로운 조건이 허다하였다. 노란 구두를 신지 말라, 팔뚝시계를 차지 말라,「슬리퍼」를 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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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9)|박화성|나혜석의 단편
이렇게 폭 넒은 사랑과 이해와 지성으로 빚어진 문우들의 우정의 뒷받침으로 내 수학의 진도는 차차로 높아 갔고, 나의 심 혼은 깨우쳐지고 살찌면서 성장해 갔던 것이다. 그해 겨울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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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8)|박화성|문학의 온상
아무리 나 혼자 앙앙 불락 해본들 현재에 엄청나게 뒤져 있으니 그의 지도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천질이 시인이라서 그런지 시의 작법이나 해설에 있어서는 어린애라도 깨우칠 만큼 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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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7)|박화성|조운의 영향
내가 선정한 곡에 맞추어 조운 씨가 작사한 노래를 가르치는데 그중에는 거칠고 장난꾸러기인 학생들이 있어서 가끔씩 나를 괴롭히려 들었다. 풍금소리와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을 위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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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문예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6)|박화성|영광중학 원 시절
『나를 부르셨습니까?』 서해가 몸을 돌렸다. 그만두라는 표시로 옆구리를 꾹꾹 찔러 주었건만 언니는 아랑곳없이 그쪽으로 다가가며 『추운데 여기 꺼정 오셨다가 어떻게 문밖에서 되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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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9)>|문예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5)|박화성|서해와의 대화
『아녜요. 저 길 잘 알아요. 혼자 가겠어요.』 나는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최서해는 벌써 납작한 중 모자를 얹어 쓰고 일어섰다. 『고집 피우지 말 구 호위 받아 편안히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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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8)|문예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4)|박화성|다정한 춘원
춘원 댁도 한옥이지만 규모가 크고 덩실하게 높아 보였다. 김명순은 더러 와본 모양으로 익숙하게 대문을 흔들며 이리 오너라 하는 대신 『여보세요!』 하고 간드러진 소리를 냈다.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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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제28화 북간도(34)
독립운동의 거성들이 빛을 잃은 대신 북간도에도 개화바람이 들어와 문화가 꽃피게 된다. 첫 문명의 전도자는 물론 선교사들이었다. 1910년께 선교차 들어온 「캐나다」선교사 박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