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제자 박화성>|<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11)|박화성|합평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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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은상은 12월 호에서부터 조운과 함께 매월 시를 발표하여 나도 더러 읽은 적이 있었는데『흙에서 살자』라는 제목이 맘에 들어 읽어보았더니 과연 동감할 수 있는 시였다.
푸른 풀 뾰족뾰족 나오는 흙 밭에
물 흐르는 진흙 밭에
흙이면(어데라도)흙 밭에
발벗고 맨발로 밟고 살자
파면 파지고 덮으면 덮어지는 흙 밭에
내 고향 흙 밭에
사람 개 도야지 풀 나무 돌 쇠들이
사는 흙 밭에
발벗고 맨발로 살자 흙 밭에 살자
이 얼마나 소박한 소망이며 정감 어린 표현인가 싶어 그의 기교적인 다른 시보다 호감이 왔다. 그 시를 읽으면서 나는 이 사람도 22세쯤 되는 청년일 것이요, 김명순이 마구 욕지거리를 퍼붓던 김기진이란 평론 쓰는 사람도「새파란 아이」(김명순의 말이다)라니 그 또래의 젊은이가 분명할 터인데 그들은 나보다 행운의 신을 먼저 잡아 유학도 하고 문학수업도 마음껏 하여 이렇게 자유로 활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뒤진 자의 비애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최서해에게 말한 대로 나는 5년 후에라야(대학의 과정을 마치고 정작 문인이 되어 철저하게 집필할 것이라는 자신의 결심을 되새기며 자위하였던 것이다.
그때「조선문단」지에는 달마다 합평회의 기록이 게재되어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방인근 (춘해), 나빈(도향), 현진건 (빙허), 염상섭(횡보), 양백화, 최학송(서해)이들은 늘 참석하는 분들이요, 때로는 박종화(월탄), 김기진(팔봉) 도 합석하였다.
그들은「개벽」지와「생장」지,「조선문단」지 등에 그 달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을 고루 읽어서 합 평을 하였다.
현재의 비평가들이 그 기록을 보면 피상적이니, 산발적이니, 또 뭐니뭐니 하고 트집을 잡을 만큼 엉성하고 틈이 비어 있지만, 필자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작품의 상황판단을 하여 친절하고 세심하게 자기들의 평 견을 말하는데 그들의 말솜씨가 구수하고 원만하여서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자리였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6월 호의 합평 때는 이기영(민촌)의『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놓고 모두들 한결같이 칭찬을 하였다. 염상섭씨가 안경을 번뜩이며『대체 이 사람이 누 굽니까?』하고 좌 중을 둘러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이 서로 얼굴들만 쳐다볼 만큼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그 작품에 대해서는 친근감과 애정을 가지고 솔직하게 자기들의 주관을 펴 가는 그들이 진정 선배다운 선배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춘해가 잡지인 다운 식견으로『가난한 사람들』은 1924년에「개벽」지에서 모집한 현장문예에 뽑힌 작품이라고 설명하여서야 그러냐고 점두 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흐뭇한 마음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1학기말시험을 치르고 귀향을 서두르고 있을 때 한동안 소식이 없던 서해가「조선문단」7월 호를 가지고 또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잡지의 어느 면인가를 미리 펴서 쥐고 있다가 불쑥 내밀었다.
『이 거 좀 보 우다.』『그게 뭔 데요?』
그가 손바닥으로 탁탁치는 대목을 보니까 임영빈의『북어 알』이라는 희곡이 실려 있었고, 또 다른 장을 넘겨 짚어 보이는 데는 채만식의『불효자식』이라는 소설이 발표되어 있었다.
『다들 이렇게 시리 부지런히 쓰고 있는데 샘도 앙이 나오?』
그가 흥분할 때면 보란 듯이 튀어나오는 사투리로 나를 몰아세웠다. 그의 서슬이 하도 강하여 처음에 잠깐 발끈했던 나는 이내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정말 고마워요. 나를 위해서 역정까지 내주시는 호의 잊지 않고 명심하겠어요. 그렇지만 저번에도 말한 대로 한5년간은 학문에만 충실하겠어요. 그 다음에도 가만히 있거든 그땐 때려 주셔도 좋아요.』잠깐 멍하니 서 있는 서해에게 나는 다시 덧붙였다.
『두고 보시면 알 거 아녜요? 5년은 잠깐 이니 깐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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