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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제28화 북간도(3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개화바람>
독립운동의 거성들이 빛을 잃은 대신 북간도에도 개화바람이 들어와 문화가 꽃피게 된다.
첫 문명의 전도자는 물론 선교사들이었다. 1910년께 선교차 들어온 「캐나다」선교사 박걸은 「스케이트」를 잘 타서 용정시가를 흐르는 해난강에서 멋진 「폼」을 보여 주고 또 자기 「스케이트」를 빌려주면서 가르쳐 주었다.
이 무렵인 「스케이트」구하기가 어려워 대부분은 나무판자에 대장간에서 버린 날을 달아 밧줄로 묶은 「짱깨」라는 것을 타고 있었다. 박걸은 곧이어 「피겨」를 소개해 인기를 끌었다.
이 해난강은 북간도 한가운데를 동동남으로 흘러 흑룡강 하류에서 합수, 동해로 흐르는 강으로 북간도의 젖줄이다. 가을엔 연어가 산란하러 올라와 이때 살을 대고 잡는 것은 풍류이기도 했다. 따라서 북간도에서의 시나 회화에는 이 해난강을 노래하고 또 그린 것이 많다.
박계주가 순애보를 쓴 것도 북간도의 용정이다. 박계주는 원산을 들락날락하면서 쓴 것이며 해난강 언덕의 얘기를 많이 묘사했다.
파인 김동환도 한때 용정에 와 있었고 그의 시집 『국경의 밤』은 두만강과 간도를 소재로 쓴 것이다.
모윤숙도 1935년께 명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이때 서울에 있는 동광 등 잡지에 기고하고 있었다. 윤영춘이 『지금은 새벽』이란 시로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34년 용정이었다.
윤영춘의 부친은 윤덕현이란 분으로 명동의 대농이었다. 윤영춘은 명동중학교 4년을 마치고 길림의 제4사범학교로 진학했었다. 졸업 후는 중국신문인 연변신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신동아의 창간호에 응모, 당선하여 「데뷔」했다. 그때 「펜·네임」은 활엽이었다.
나도향도 20살 안팎에 용정에 와 있었다. 그는 『홍염』이란 작품을 쓸 때 아주 어려운 환경에 있었고 때론 구들장이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화성이 한때 간도에 와 있었고 지금 서강대학교수인 전해종씨와 작가 안수길 전영택 등등 북간도를 거쳐간 학자나 작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안수길씨는 그때의 경험으로 소설『북간도』를 썼다.
그 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것은 「스텔러·펜슨」이다.
「펜슨」은 1935년께 북경에서 세관장을 하던 남편이 용정으로 오게되어 북간도에 왔던 영국 여인이다. 그 때 45세쯤이었다.
용정에는 이 무렵에 「러시아」혁명 때 피난 나온 이른바 백계노인이 몇 명 있었다(이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은 「하르빈」이다) .
「펜슨」여사는 이들의 피난생활을 주제로 하여 소설 『트랜스 프랜트』를 썼고, 이것을 본국에서 출판했는데 이는 백계노인의 슬픔을 세계에 알린 걸작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다.
수년 전 미국서 「베스트·셀러」로서 잘 알려진 순교자의 저자 김은국도 어릴 적에 용정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김찬도인데 은진중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김찬도는 32년에 있은 수원농고(현 서울농대) 사건의 주동자였다.
일제에 체포되어 5년의 실형을 받고 나왔으나 그 뒤에도 박해가 심해 간도로 김약연을 찾아왔던 것이다. 어릴 적 김은국의 뇌리에 이것이 사무쳤던 것인지 모른다.
북간도에서는 그때 인쇄시설이나 출판사가 없어서 모든 작품을 우편으로 서울에 보냈었다.
따라서 그만큼 예술활동은 힘이 들었던 것이다. 또 대부분의 문인들은 당시 민족교육을 담당하던 여러 사립학교에서 임시로 교편을 잡으면서 예술활동을 했고 그들에 대한 인기는 높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그곳 청년들의 존경을 한 몸에 지녔다.
연예는 조선에서 가끔 부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유랑극단에 의존했다. 새 노래나 「디스크」 등은 이들이 전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예활동 이외에 근면·노력·성실로써 전 만주의 모범이 된 사람도 나왔다.
김유연이 모범독농가로서 만주지방 동포들의 존경을 받은 것이다. 그는 김약연의 셋째 동생인데 형과는 또 다른 입장에서 「동거우」(동구)라는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은 물론 벌을 1백여통이나 치고 양잠을 하고 집 주변을 과수 및 축산단지로 조성하고 직접 가족을 동원하여 명주·베를 짜는 등 완전 자립·자급자족의 농업경영으로 본을 보인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자 만주국이 된 뒤 교과서에 실었고 각지의 농사지도자들이 줄이어 견학했던 것이다. 지금 숭실고교의 영어교사로 있는 김정우씨가 김유연의 둘째 아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잠시동안의 태평 「무드」속에 격렬한 항일시인이 나왔으니 그가 옥사한 윤동주이다. <계속> [제자 이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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