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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제자 박화성>|<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9)|박화성|나혜석의 단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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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렇게 폭 넒은 사랑과 이해와 지성으로 빚어진 문우들의 우정의 뒷받침으로 내 수학의 진도는 차차로 높아 갔고, 나의 심 혼은 깨우쳐지고 살찌면서 성장해 갔던 것이다.
그해 겨울방학에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라는 두 청년이「에스페란토」강습을 위해 읍내에 와서 1주일간 머물렀는데 그들은 조운 등의 교원들과 일면여구의 친지들이 되었다.
그때 연희전문에서 발행하는「학생 계」라는 교지에 나의 최초의 시『그대여 백합이 지기 전에…』가 늦여름엔 가 발표되었는데 두 사람 중의 C라는 학생이 편집담당자여서 그들의 요청으로 나는 만찬에도 참석하였다.
그 시는 영광에 와서 조운 씨의 지도로 비로소 시답게 쓴 시였는데 그것 역시 운 씨가「학생 계」에 보냈던 모양으로 활자화한 후에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23년쯤의 일로 기억되니까 이 무렵의 일일 것이다. 동경에서 유학하는 여학생들이 만들어 낸「여자 계」라는 얄팍한 잡지가 있었다.「학생계」는 표지나 제본도 그럴듯하고 두께도 다른 잡지에 비하여 오히려 부피의 무게가 있는 호화판(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이었는데「여자 계」지는 모든 게 다 초라하고 인쇄까지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거기에 춘원의 부인 허영숙 씨와 여승이었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일엽 김원주 씨의 수필이 실려 있었고, 화가 창월 나혜석 씨의 단편이 발표되어 있었다. 나씨는 당시의 화가로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부부』라는 짤막한 소설에서 억울하게 학대받는 한 여성이 조혼이 빚어낸 봉건적 유습에 비참하게 희생이 되는 생활상을 재치 있게 잘 그려내 나는 그것을 읽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여자 계」는 몇 호 인가에서 끝나고 나씨는 고인이 되었지만, 만일 생존했더라면 우리를 압도하는 큰 소설가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1924년에는 새로 깨우쳐진 호기심에서랄까 여러 편의 시작을 하면서 그 소위 완전 창작물인『팔삭동』을 썼고,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가 취재한 것으로 9월 중순에『추석전야』를 집필하여 1925년 1월에 추천을 받았으니 영광읍 교촌리에 있는 향교의 건물이 내 문학의 산실이었음을 누구 나가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향교의 이 건물은 영광중학 원의 건아들의 정다운 교사가 되기 이전부터 교육에 있어 당지의 큰 공헌을 하여 왔다. 대한제국 광희년대에 바로 이 자리에서 광흥학교가 창립되어 많은 인재들을 길러 냈으나 저 굴욕의 한일합방으로 하여 눈물로 폐교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영광중학 원의 원장을 비롯한 읍내 유지들의 거의가 광흥학교의 출신들이어서 그들의 지조와 애국심이 대단히 강렬하고 그런 까닭에 두메에 지나지 않은 이 영광이 문화면에 일찍 눈을 떠 문 향으로도 손색이 없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해 오는 것이다.
예정대로 나는 다시 학업을 계속하게 되어 적선동 언니의 곁을 떠나 수창동에 하숙을 정하고 날마다 통학하면서 많은 학과를 배우는 데만 전념 하느라니 외부와의 접촉은 자연히 뜸해졌지만, 어렵사리 (어렵게) 구해 온「조선문단」4월호에서 조운 씨의『봄비』라는 짤막한 시를 읽고 재삼재사 감탄하였다.
비라도 봄비니
맞어나 두자
이 비를 맞아서
마음이 젖으면
행여나 새 엄이
도다나 나도
다감다한한 외로운 그의 심경이 손에 잡히는 듯하여 소소한 영광생활의 향수가 일기도 하였다. 그 4월 호에는 춘원의 서적광고가 풍요하게 났다.『무정』『개척자』『허생전』『금강산유기』『단편소설집』등 이 이광수·춘원·장백산인 등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그는 평생의 정력을 다 이 잡지에 쏟는 듯, 혼자서 매월 소설과 시와 단상·평론·일기·기행문 등을 여러 가지의 아호로 쓰는데 후일에는「고주」도 애용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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