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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생명의 향과 사각사각 맛있는 소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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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2면

1 심신이 지쳤을 때 녹색의 치유력은 더욱 극적으로 발휘된다

아기가 아팠다. 코감기, 기관지염, 편도선염 등으로 두 달을 꽉 채웠다. 한 달 전 내가 오랫동안 아팠다고 썼는데 이번엔 아기가 아팠다고 하니 “환자 가족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지난 두 달간 우리 집의 가장 큰 이슈는 식구들의 건강이었으니 달리 할 말도 없는 게 사실이다.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16> 거제 죽순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기가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이때, 내가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리라. 아프거나 지친 것은 아니고, 그저 무기력해진 느낌이 며칠 동안 계속 들었다. 물론 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거제에 볼 일이 있던 어느 날, 원래 출발하려던 시각보다 조금 더 서둘러 집을 나선 것은 되도록 빨리 젤리 속에 갇힌 느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함이었다.

집에서 출발해 대략 30, 40분 정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곳, 거제 하청면. 거제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고현을 지나자마자 좌회전을 해 곧장 내달리면 다다르는 그곳에 대숲이 있다. 담양의 소쇄원이나 죽녹원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유래나 규모가 더 깊거나 크지는 않지만, 지친 한 사람의 몸을 의탁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녹음이 드리운 곳이다. 물론 2000원의 입장료는 내야 하지만 말이다.

국산 죽순 70%가 거제산 … 담양서도 구입해 재판매
맹종죽 테마파크라는 이름은 최근에야 붙여진 것이다. 원래는 그저 대숲이 무성하던 이곳은 중국이 원산지인 맹종죽을 하정면에 살던 한 사람이 일본에 산업시찰을 다녀오는 길에 가지고 와 심어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맹종죽은 대나무 품종 중 하나인데, 중국 삼국시대 맹종이라는 효자가 어머니 병구완을 위해 눈 속에서 죽순을 찾아 결국 병을 낫게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에 앞서 나는 우선 잠시 쉬는 게 우선이었다.

마침 그곳에는 벤치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아무도 없는 대숲에서 바람 따라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하릴없이 앉아만 있었다. 잠시나마 그동안 집안에서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던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행복해졌다. 정해진 일정 때문에 행복을 오래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죽순을 사는 것을 잊진 않았다. 구입처는 지난해 이맘때 아내와 함께 들렀던 곳이었다.

죽순 한 봉지를 부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난해에는 막 수확한 죽순을 삶아내던 커다란 가마솥도 걸어놨었는데, 올해는 어찌된 영문인지 보이질 않았다.

2 대숲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담양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다 3 갓 캐내 삶은 죽순. 마디대로 자르는 것보다 길이대로 자르는 편이 낫다 4 죽순은 특히 기름진 것과 궁합이 좋다

“죽순은 전부 삶아서 파시는 거죠?”
“삶지 그럼. 쪄서는 떫고 애리가(아려서) 몬 먹는다.”

되도 않는 소리라는 듯 잠시 웃던 아저씨를 보며 지난해 들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죽순맹키로 빨리 자라는 게 없다. 땅에서 캐 놔도 그 상태로 자라는 기 죽순인기라. 그래 갖고 오자마자 전부 삶아야 향이나 맛이 변치 않지.”

가만, 그러고 보니 건물 외관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 보지 못했던 창고도 보이고. 기웃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커다란 솥이 하나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하, 저기다 삶아내는 거였구나. 이제 죽순을 좀 더 체계적(?)으로 판매할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죽순 묵는 기는 알고?”

새로 장만한 게 틀림없는 냉장고에서 진공포장된 죽순을 꺼내며 아저씨는 나를 돌아봤다.

“죽순이야 뭐 날로 먹어도 좋고 찌개 넣어 먹어도 좋고 생선조림에 넣어 먹어도 좋잖아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내 모습 때문이었는지 모범답안 때문이었는지 아저씨가 날 마주보며 씩 웃었다.

“잘 아네, 죽순 좀 무 봤나?”
“작년에 먹었죠. 여기서 사서.”

그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저씨에게 며칠 전 지역 뉴스 에서 본 기사의 진위에 대해 물었다.

“근데 정말 담양에서 여기 죽순을 많이 사가요?”
“그 봤나? 담양에서 거제 죽순 마이 사간다.”
“왜 그런대요?”
“거야 관광객들이 하도 많이 왔다 갔다 하이 물량이 딸리가 그라지. 여는 묵는 사람들만 묵고.”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고 지역 신문과 방송의 기사에 따르면, 이곳 거제에서 생산되는 죽순 중 절반 이상이 담양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사실 전국 죽순 생산량의 70% 정도가 거제 맹종죽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장 많은 죽순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대나무=담양’이라는 등식을 불식시키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떤 재료와도 궁합 … 느끼한 맛의 해결사
포장된 죽순을 꺼내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 향긋한 맛이 벌써 코끝에 맴돌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죽순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먹는 방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죽순은 결코 어렵거나 까다로운 재료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 데나 다 넣을 수 있기에 죽순만큼 다루기 쉬운 것도 없을 정도다. 볶음의 경우 더더욱 그러한데, 기름기나 많은 요리에 죽순이 첨가되면 느끼함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 아내가 준비해 놓은 오리고기와 죽순 볶음은 잘 어울릴 수밖에.

다음날 우리는 좀 더 색다른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올리브 오일을 베이스로 한 스파게티에 죽순을 넣어보는 것이었다. 토마토나 크림소스를 베이스로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올리브 오일이라면 죽순이 잘 어울릴 것이라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애초에 올리브 오일을 베이스로 한 알리오올리오 같은 스파게티는 느끼하면서도 담백한 이율배반적인 맛과 올리브향을 즐기기 위해 먹는 바, 거기에 죽순의 사각거리는 식감과 맑은 향이 더해지니 스파게티를 먹는 즐거움이 한층 배가 된 것이었다. 덕분에 아기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사이, 우리는 그제야 한 그릇의 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깨어난, 그래도 엄마 아빠가 마지막 한 가닥의 면발을 먹을 때까지 용케 기다려준 아기를 안아들고 토닥이며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이 아기가 부디 죽순처럼 자라기를. 어디에 있든 조화롭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주위를 맑고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말이다. 갈색의 무언가가 가득 찬 기저귀를 갈아 주기까지는 정말 간절했던 소망이었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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