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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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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이달에도 역시 양적으로 풍성한 느낌은 들고 있읍니다만 그 많은 시를 읽고 느끼는 것은 씁쓸함뿐입니다.
홍=대체로 봐서 시인들이 시나 자기 삶에 대해서 너무 자신감들이 없는 것 같아요. 늘 비슷한 이야기의 되풀이거나 시는 이래야 된다는 식의 근엄한 표정만 짓고 있어요. 생각을 닫아놓고 시나 사물을 바라보는데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미 만들어진 틀에만 매달리는게 아닌가 싶어요.
이=슬픔과 노여움이 왜 그렇게들 많은 지요. 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든 좋습니다만 정말 자기 나름의 끈끈한 삶이 묻어있지 않으면 공허하죠. 작품 이야기를 하지요.
홍=서정주씨의 『잔』 (문학 사상)이 주목되는군요. 근래 불교를 바탕으로 한 영원주의가 시에 자꾸 되풀이되어서 좀 지루했었는데 이 작품은 좀 다르군요. 장미 한 송이를 잔으로 비유하면서 사는 일의 측은함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대가다운 정신의 여유랄까 「볼륨」도 느낄 수가 있고.
이=생명 현상을 정선된 낱말과 유창한 「리듬」으로 긍정한 작품이죠. 서경과 심경이 동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요. 삶을 축제로 파악하는 이 시는 완벽한 표현에서 오는 설득력도 함께 지니고 있군요. 문덕수씨의 『빈소』 (월간 중앙)도 재미있군요.
홍=과거 선이나 원, 공간 등 추상적인 사물을 통해서 「이미지」만을 추구하던 씨의 태도에 그대로 이어지는 작품이군요.
이=여기서도 예각적인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면서 인간성의 본질적인 면을 조명하고 있군요. 『팔 끝에 잎사귀처럼 달려 있는 손』은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이미지」이지만 『아벨을 죽인 이 손』으로 이어져서 원죄 의식에까지 연결되고 있지요. 비슷한 연배의 성찬경씨의 『간장』 (문예 중앙)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박제천씨의 『심법』 (문학과 지성)은 치밀한 「이미지」의 조형에 주력하던 씨가 이제 유언한 명상의 흐름 속에 정선된 「이미지」를 제시하고 경어체의 문장으로 회화적인 음악성을 얻고있군요.
홍=현학적인 느낌이에요 『심법경사자집』으로 된 제목도 그렇고 팔대산인이나 황제의 옛 일을 끌어오는 것도 그렇고. 물론 그 나름의 의도는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 삶에 대한 성찰입니다. 「풀꽃」·「잡초」·「지천이 된 것」을 통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높은 상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어요.
이=끝으로 문충성씨의 『구슬 빚기』 (문학과 지성)는 어떻습니까. 이야깃거리가 있고 그 이야깃거리를 독특한 문체에 담고 있는데요. 이 작품은 자연스러운 회화체와 함께 언어의 절제를 통한 긴장과 감정의 굴절을 보이고 있군요. 삶에 대한 남다른 투시력도 있고 언어의 통솔력도 뛰어나는데….

<대담>
이영걸 (문학 평론가·외대 교수)
홍신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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