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쾌동 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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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는 이름마저 쾌동이었다. 마치 율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버지도 율을 좋아해 9세 때 그를 박생순씨에게 맡겨 양금을 배우도록 했다.
가야금엔 12세 때 손을 대었다. 아버지는 그에게서 미래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5세가 되면서부터는 당대의 명률 백낙준씨에게 거문고를 사사하게 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인으로 한 경지를 이루는 것은 오히려 그 과정이 더 감동스러울 때가 많다. 신쾌동 옹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거문고에 평생을 맡길 양으로 그 위에 손을 얹으면서 고초의 길은 하루도 면할 날이 없었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술회한 일도 있었다. 『술도, 밥도 나오지 않는 거문고 따위』에 뜻을 두는 것이 언제나 그의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가 거문고에 좀 소홀한 듯하면 목침을 던지곤 했었다고 한다.
거문고는 1천5백여년 전 고구려 장수왕 초엽에 재상 왕산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무렵 이웃 나라인 진국에서 칠현금을 보내왔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탈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재상 왕산악은 그 칠현금을 보고 언뜻 이것은 중국인 성악에나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현학금이다. 그 음과 율이 어찌나 아담하고 현묘 했던지 거문학 (현학)이 날아와 그 음조를 타고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한다. 후인들은 현학금에서 「학」 자를 빼고 현금이라 이름지었다. 오늘의 「거문고」는 이런 일화를 갖고 있다.
거문고 판은 오동에 밤나무를 받쳐 만든다. 현은 문현·유현·대현·나상청·나외청·무현 등 6현이 있다. 이 가운데 3현은 16개의 박달나무로 만든 패 (나)로 괴었고, 나머지 3현은 역시 박달나무의 기러기발 (안족)로 받치고 있다.
우리 국악의 음계는 5음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그것과 같다. 여기에 12율이 있어 모두 60조의 음률을 가져 그 미묘하고 섬세한 효과를 갖는다.
역사상 명인들은 적지 않다. 왕보고·속명득·귀금·안화·극종 등. 신라 때의 백결 선생도 있다. 추석인데 거문고나 타고 있는 남편이 그 부인에겐 더없이 한탄스러웠던가 보다. 그러나 백결은 거문고로 방아찧는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했다는 고사도 있다. 예인의 청빈은 예나 이제나 매한가지인지-.
인간문화재인 신쾌동 옹은 생전에 『내 거문고 소리를 뺏어 가는 제자가 없다』고 안타까워했었다. 그의 부음을 들으며 더욱 적막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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