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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2)바둑에 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떠한 분야든간에 「리더」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비계의 발전도 바둑수의 고하에 앞서 성사봉공의 희생정신이 남달리 강한 사람이 앞정서 주어야만 그사람의 지도능력으로 인해. 장계는 발전하는 것이다.
임시수도가 있었던 부산은 재경기사가 대거 이곳에 피난을 와서 기계가 융성했으나 이들이 서울로 가자 부산기계는 한동안 빈집처럼 쓸쓸했다. 당시 부산에는 임호2단, 권재형초단, 금재 일초단같은 쟁쟁한 실력자가 있었으나 기계를 「리드」할 형편은 아니있고, 또 하려고도 하지않았다. 그러던 차에 「아마」2, 3단격인 김탁씨가 나타나 부산기계는 다시 활력을 찾았던 것이다.
김탁씨(김수영5단의 부친·작고)는 함남함주군연초면에서 1908년에 태어났는데 부친 김승민씨는 구한말에 종두벼슬을 지냈고 또 독립투사로서 해방후에는 독립무장을 받은 애국지사. 그분의 7남매중 네째로 태어난 김씨는 18세되던 해에 웅지를 틀고 북경대학을 고학으로 수업, 27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어구협동환심시정까지 지냈다.
그후 족산업과 토건업으로 치부했었으나 6·25동란으로 공수가 되어버린 김씨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신선놀음으로 소일하기를 마음먹어 기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동안 실업계에서 떨친 솜씨를 기계에서 활용했으니 부산기계는 갑자기 활기를 되찾았던 것이다.
김씨는 학생시절에 바둑을 배워 사교계에 들어가보니 교제상 필요하여 고수에게서 1년간 지도급 받았고, 여기서 3급정도로 항상되었었다고 한다. 또 김씨는 필거의 기원에서 기원의 생리를 잘 파악했으므로 기계를「리드」하는데 적격자었다. 한편으로 학생시절부터 문학에 취미가 깊었던데서 문장솜씨도 보통은 넘었었다.
그래서 첫번째로 56년 부산한성중학에 재학중인 백간연군이 인단하자 그를 중심으로 하여 국제신보의 바둑난을 신설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국제신보는 승역급에서 특별히 바둑을 두는 분이 없었으나 이들을 잘 설득시켜 바둑을 연재키로 했으니 사교는 물론 설득력도 풍부한 분이었다. 따라서 국제신보를 매개체로 하여 바둑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57년3월에는 서울인금산대항전을 마련하여 이 기파를 국제신보에 연재했으며 또 조초단을상대로 한 김봉선5단과 필자의 7번기, 경남선수권전기보등 등으로 신문바둑을 통해 바둑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성격이 대쪽같이 곧은 편이어서 춘추축법의 기를 지킨 분이라 하겠다. 따라서 신문바둑의 관전기를 도맡아 썼는데, 기사들의 대국태도나 또는 예의에 어긋나는 점이 보이면 이를 가차없이 밝히곤 했다.
63년7월20일 경촌바둑선수권전이 마산에서 개최되어 필자가 이곳에 갔을때 그 자리에서 국대신보는 필자와 신예기사의 대국을 주선했었다. 당시 2단이었던 어느 젊은 기사를 상대로 한 대국이었다. 「타이들」에서도 그것이 나타났지만 그 당시의 그는 아직도 저단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의 상식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필자와의 거리는 장당한 층이 진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때의 그 신진은 대선배를 상대로 한 것도 사심이지만 어쩌면 배우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대국이었다. 이 대국에서 그의 대국태도가 김씨에게는 불손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커가는 기사들의 장래를 의해 깨우쳐 주어야겠다는 심정으로 관전기에서 꾸지람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그 젊은 기사가『격려는 못해줄 망정 불손하다고 신문에 밝혀졌으니 누가 나를 좋아하겠느냐』고 대물어 한때 물의를 빚은 일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있었다. 「요미우리」신문의 「야마마」(산전려면자)가 오청원9단에 대한 「사까다」 (판전영남) 9단의 대니태도가 예의없음을 보이자 이를 관전기에 썼다. 그렀더니「사까다」가 『그건 너무 심하게 쓰지 않았으냐』고 더듬었으며 「야마따」 는 『네, 그래요?』해놓고 다음날에는 『이런 불손한 태도를 썼다고 「사까다」가 대들더라』하고 썼다.
이 것을 안「사까마」는 싸우면 싸울수록 손해다싶어 「야마마」를 찾아와 『제발 용서해 주시오. 다시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않겠읍니다』하고물러나 이사건은 잠잠해진 일이 있었다. 「야마마」의 관전기 못지않게 김씨의 필력도 강직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 김씨로 인해 부산기계는 재출발의 신호를 올리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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