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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제56화 낙선제 주변(40)|김명길<제자 김명길>|봉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봉서란 왕·왕비가 친족에게 쓰는 편지 모는 신하의 부인이 왕비나 세자비에게 쓰는 편지를 말한다. 서로 마음놓고. 대궐을 드나들 수 없으므로 봉서는 대궐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봉서는 대부분 제조 상궁이 대필했는데 제조상궁이 연로하게되면 지밀나인 중 글 잘하는 나인이 맡기도 한다. 왕비의 봉서를 쓰는 일이란 그만큼 재주도 있어야했고 가깝게 모실 수 있으므로 많은 나인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윤 마마의 경우 본 곁과 영친왕 내외에게 보내는 봉서가 가장 많았는데 본 곁에는 매일 아침마다 한통씩, 영친왕 내외에게는 양 전하에게 각각 1통씩 한달에 2∼3번 정도 오갔다.
영친왕 내외에게는 일본말로 써야했기 때문에 으례 내가 맡아야 했다. 본 곁에 보내는 편지도 28세 때부터는 내가 모두 쓰게 됐다. 그동안 쓴 봉서만도 1만통이 넘을텐데 내 젊은 시절이 몽땅 그 속에 잠겼대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가는 편지의 내용이라야 매일 쓰는 것이므로『밤새 침수제절 안녕하시오…』『안부 엿잡고 원조에 옥후 안녕하오신일 아옵고저 바라보며 아뢰올 말씀…』과 같은 정도였다.
때로 국기같은 날에는「유능국긔니나 ?시니비확창통?여?나이다』라고 웃분의 심중을 그대로 옮기기도 한다. 이와 같은 봉서는 윤 마마의 지시로 쓰는 것이 아니고 쓰는 사람이 윤 마마의 기분을 살펴 쓴 다음 윤 마마가 한번 읽은 후에 본곁으로 나가게 된다. 봉서를 받은 본곁에서도 답장 봉서를 매일 돌려보낸다.
봉서의 전달은 글월비자라고 허리에 검은 띠를 맨 비자가 맡았다. 이 글월비자들도 딴 비자와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치마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멧방석처럼 틀어 올렸다.
댓돌 아래서 대기하고 있다가 봉서를 내주면 주칠한 봉서함에 넣고 자주 끈으로 묶어 신주 모시듯 들고 나간다. 봉서를 받은 본곁에서는 그 자리에서 답장을 써주어 비자 편에 들여보낸다.
상궁들도 따로 양반 부인들과 편지 왕래가 있었는데 이것을 글월이라고 했다. 상궁에게 보낼 때는 창호지에 쓰고 왕비나 세자비에게는 두툼하고 다듬어진 간지를 접어만든 편지지에 써 보낸다.
양반 부인네들은 왕비에게 매일 쓰는 것은 아니고 정월 초하루나 탄일같은 명절에나 봉서를 올린다. 이것은 규정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메일 봉서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 황송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국족척(임금과 같은 본의 성을 가진 사람과 왕비의 친척) 중에는 각전 제조상궁께 날마다 글월을 하여 왕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샅샅이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이렇듯 지밀나인에게 있어서 글은 중요해서 입궁 후 종아리를 맞으며 궁체글씨를 배우게 된다.
내가 입궁 했을 무렵만 해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봉서는 하루 1통이었으나 경복궁 시절에는 조석으로 봉서문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부모뿐 아니라 종질까지 봉서를 올렸다니 그 답장을 쓰는데 만도 하루해를 다 보냈을 것이다.
선대의 나인 중에는 유려한 궁체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있었는데 출궁하여 결혼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홀로 살게 되자 그 글 솜씨를 높이사 다시 불러들었다니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니다.
또 고종의 제조상궁인 서씨는 영의정을 지낸 윤용구 대감과 글월을 통한 교제로 의남매까지 맺었다고 한다.
벼슬아치와 서신을 교환하는 것은 서씨처럼 사서삼경을 익힌 몇몇 상궁에게만 가능했겠지만 아뭏든 지밀나인의 글 솜씨는 여러해 동안 갈고 닦은 솜씨로 꽤 수준이 높았다.
궁녀들의 글 솜씨는 봉서 뿐 아니라 발기(건기)라고 궁중의 물품이나 하사품 적을 때도 발위된다. 발기란 요즘말로 하면 경리장부와 비슷한 것이다.
왕이나 왕비께서 『어느 집 누구가 생일이라니 명주 한 필을 주어라』하시면 열쇠를 쥐고있는 제조상궁이 친히 곳간으로 나오신다. 그러면 부제조 상궁이나 나인이 옆에 앉아 곳간에서 빼낸 물품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 발기는 가례나 진연이 있을 때면 몇 두루말이씩 써내야 했다. 밤 한톨이라도 기록을 해두었기 때문에 가례 같은 행사가 있으면 선대에 써둔 발기를 참고하기도 했다. 순종 때의 발기는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이 많아 안타깝기만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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