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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국가개조와 권력의 적자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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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나라 운영 이대로 안 되겠다는 국민적 합의는 이미 이루어졌다. 국가개조가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대통령도 명시했다. 문제는 나라의 틀과 운영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사업인지 알고 있으며 이에 더해 그런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힘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큼 축적되어 있느냐다. 충격적 참사를 경험한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하려는 국가개조의 실험이 자칫 권력의 적자운영이란 덫에 걸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나라의 어려운 고비마다 제기해 왔던 ‘권력의 적자운영’이란 경고를 다시 한번 내어놓으려니 쑥스러운 자격지심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재정이나 가계살림이나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될 때 적자운영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상식이다. 정치권력도 정책목표를 구현하고자 권력지출에만 전념한 나머지 상응한 수준의 권력수입을 게을리하다 보면 당연히 권력의 적자운영이란 덫에 걸릴 수 있다고 여러 차례 지적해 왔다. 권력지출이 급격히 증가하는 경우, 즉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국민의 협조를 유도하는 바로 그때가 권력적자의 가능성이 가장 커질 수 있는 위험한 시기다. 이러한 권력적자의 문제는 민주화 시대에 들어오면서 훨씬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민주화 이전의 독재정치나 권위주의체제에서의 국가정책집행은 국민들의 저항이나 다양한 입장을 폭력과 위협, 그리고 회유로 억제하는 국가의 강제력이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국가권력의 담당자가 국민의 자유로운 투표로 선정되고 안정된 국가운영도 상당수준의 국민적 지지를 필요조건으로 삼게 되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조문이 안정된 민주국가운영은 국민의 지지와 찬동에서 비롯되는 권력수입을 전제로 한 권력의 흑자 또는 균형경영을 필요로 한다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가 계속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러한 권력의 흑자운영을 가능케 하는 제도화나 관행을 만들지 못한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의 발전과정이 남긴 너무나 많고 무거운 과제를 짊어지고 출발했다. 이미 지적한 대로 87년 체제의 민주주의 제도화 실험은 다섯 대통령과 여섯 국회를 거치면서 별다른 성과 없이 그 한계점만 적나라하게 노출했다. 한 세대에 걸친 고도성장 덕분에 선진국 진입을 엿보게 되었으나 빈부격차의 심화, 이념의 양극화 등으로 나타난 사회분열의 증상은 온 국민이 공유하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2012년 대선의 주제를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건설로 압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난 1년여의 한국 정치는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민주적으로 풀어 가는 데 극도로 역부족임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서 당면하게 된 세월호 침몰의 충격으로 과연 지금의 위험사회가 안전사회로 쉽게 전환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나 반면에 이번 비극을 인간중심의 민주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사회개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국민적 결의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국가개조는 사회통합과 함께 추진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안전’과 ‘공정’을 우선목표로 지향하며 ‘위험’과 ‘부정’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인간중심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면 젊은 세대를 비롯한 대다수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하다. 국민과의 대화, 국민 사이의 대화, 즉 대화를 통한 소통의 시대가 문을 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려면 반폭력문화, 특히 학교폭력과 여성폭력을 반공동체적 범행으로 준엄하게 다스려야 하며 사소한 위법행위를 가볍게 보아 넘기는 불법의 방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한마디로 정직하게 약속을 지키는 시민공동체만이 인간안보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박근혜 정부가 주도할 국가개조 노력은 국민들의 광범위한 동참이 필수요건이다. 종교계, 언론계, 시민단체들이 적극적 동반자로서 크게 공헌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권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은 개조노력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 민주국가에서의 국가개조 노력을 어떻게 정치를 피해 가며 시도할 수 있겠는가. 한편 근래에 국민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관료집단도 그간의 해이된 규율을 재정비하고 본분을 되찾아 국가개조에 적극 공헌해야 되겠다. 권력의 적자운영 가능성을 걱정한다면 권력지출의 전문가들보다도 권력수입에 뛰어난 자질을 갖춘 인물들을 우대하는 인사정책을 과감히 시도할 수도 있다. 결국 국가개조 노력을 통해 참된 민주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 아니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