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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여류시도 문제지만 여성화한 남성시도 한심”|최근의「여류 시 논쟁」에 붙인다&&여류시가 관능에 기우는 건 사실| 한심한 남성시의 창백한·무력감|상별보다 시작태도가 문제|「해야할 말」담은 시 드물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근래에 들어서 여류시에 대한 논쟁과 비판이 그 어느 때 보다 활기를 띠고 있는 듯하다. 여류시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반성의 제기는 비단 여성 시인들의 시에 국한 될 것이 아니라 시인의 성별에 관계없이 신시 70년 사의 시사적 관점에서 모든 우리 시를 대장으로 좀더 심층적이며 본론 적으로 제기되고 검토됨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류시가 마치 저질시의 한 표본으로서 혹독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래의 우리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퇴영적이며 비현실적·소아마비적 무력성과, 관념적이며 추상적 자의식 과잉의 난해성의 여러 맹점들은 여류시가 안고 있는 한 단면일 뿐더러 우리 시 전체에서 드러나는 척결해야할 요소들인 것이다. 몇 몇 우수한 여류시인을 제외한 대다수 여성 시인들의 시작품에서 우리는 시를 읽는 염증과 당혹감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간파해 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여류시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절실한 「해야할 말」을 잃고, 좌절과 고통의 극복을 회피하고 있으며, 미세한 기교주의에 기울어 관능적 정서와 말초적 통찰에 의한 섬약성과 유약성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시의 효용가치와 존재 가치의 위기마저 생각게 하는 우려할 만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여성시인들 (여성화한 일부 남성시인들의 시를 포함해서)의 이러한 시작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더욱 회의적이며 부정적인 비판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남성적이며 대륙적인 초월과 극복과 대결의 치열한 시정신이 시에서 사라지고, 한 시대의 대중적 갈증이 해소되지 못한 불행한 시대의 시민들에게 시인 자신의 극히 사적이고 개인 취향적 심미 추구의 시의 전개가 시로서 호소력을 잃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같은 현상이 더 오래 지속된다면 대중의 시에 대한 불감증과 불신이 초래될 것이며,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시와 대중의 단절을 의미하게 된다. 여성시인·남성시인의 구분을 차지하고 시인은 누구보다도 시대 그 사회의 대다수가 요구하고 갈망하는 가장 절실한 정신적 수요를 충족시킬만한 위대한 마력을 시의 형식으로 승화·공급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대중의 진실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진실은 이미 대중전체의 공감 근거를 학보하고 있으며 대중의 아픔은 보다 더 절실한 개인의 아픔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에서는 그러한 대중적 공감의 「넓이」를 지닌 감동적인 시가 거의 창작되고 있지 않는 것은 위대한 시인과 시의 시대가 아직도 이 땅에 도래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감각과 역사의식을 포옹하는 어떤 획일화된 하나의 시적 「패턴」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또 여류시인 이라고 해서 「한국여성들이 겪어오고 있는 보편적인 운명」 「연탄재와 기저귀와 부뚜막의 얼룩」 등 의 여성 현실 특유의 소재를 반드시 시화해야 한다는 사시안적 역설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김남조 나 허영자·김윤희·김선영·유안진·강은교 등의 여류시인들이 보이고 있는 절묘한 서정의 극치, 영원한 사랑을 지향하는 순정한 시 세계, 내면의식의 깊이를 추구하는 치열한 시정신에서 우리현대시사가 결코 여류시인의 공백기를 갖고 있지 않음을 기뻐한다. 다만 앞에 열거한 몇 몇 여류시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여류시가 드러내는 고질적인 병폐와 취약성·여성화한 남성시인들의 창백한 무력감과 안일주의에 빠진 시들이 우리시의 전모인양 독자에게 오도되고 양화가 구축된 악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시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깊은 우려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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