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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만박「대한제국관」참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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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오늘날 「유럽」에 윤출한국의 「이미지」가 점점 부각되고 있지만 우리가「유럽」에 최초로 상품을 보낸것은 77년전 「파리」만국박람회때였다. 1900년 지금의 「에폘」탑뒤「샹·드·마르스」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에 한국관을 마련, 비단·도자기등 각종 고유상품을 전시했었다. 진열상품들은 당시 주한「프랑스」대사관 「콩랭·드·프랑」공사가 수집한 것으로 전해지며 한국측 박람회위원장은 민영찬공이었으나 실제로「파리」에서 한국관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이인용으로 알려져있다. 고종황제는 당시 이박람회에 특파대사로 국내부협판 민영찬(민영환의제)을 파견했다. 그러나 한국상품에 대한 현지반옹은 전혀 알려진바 없었는데 최근 「파리」대학에서 동양사박사학위를 받은 이진명씨가 당시 한국관계연구의 귄위 「모리스·쿠랑」의 한국관참관기를 「파리」의 속양어학교에서 찾아냈다. 이 참관기는『1900년, 서울의 추억』이라는 제목에 『「샹·드·마르스」의 한국관』이란 부제를 달고있는 8「페이지」짜리다. 다옴은 그 요약이다.
「샹· 드· 마르스」의 한구석에 뚝떨어져 「슈프렌」가를 등지고 있는 한국관은 수많은 관람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채 있다. 겸손한 탓인지 수줍어서인지 한국관은 이 나라가 지금까지 겪어온 것처럼 고립된「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극동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한우도의 젊은 대한제국의 친구들만이 이 훌륭한 관읕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한국관을 방문할 가치가 있다. 새한국이 출발한지 이제 겨우 5년, (1894년 박영효둥 개화당이 근대화를 목표로 주도했던 갑오경장을 지칭하는 둣함) 일본과 같은 변화가 있으려면 아직도 수년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 대한제국이 처음으로 만박에 참가한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근대화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전기에 들어섰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관에는 복잡한 기계나 현대산업의 제품이 없다. 경제발전은 아직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는 농업국이다. 이 나라에는 사냥거리가 많은 넓은 숲이 있고 말과 소가 있으며 바다에는 생선과 식용해초가 풍부하며 석탄과 금이난다. 관람객들은 진열장에 꼬리표를 붙여 진열된 견본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보게된다.
권력의 남용을 지양하고 한국에 도움이 될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고 싸면서도 빠른 교통수단과 섕산수단을 이룩하며 보다 균등한 사희점의와 보다 정확하고 엄격한 재정제도를 갖추는한편 없는 돈으로 외국에서의 무기구입에 광분하지 않으며 가능한 범위안에서 서구열강보다는 소국인「스위스」나 「벨기에」를 「모델」로 삼는다면 한국경제의 앞날온 무척 밝다.
한국관은 이 나라 문화의 요약이다. 얇은 명주·무늬없는 비단·찬란한 빛깔로 무늬를 수놓은 비단·몇가지 부드러운 색으로 조화를 이룬 비단들도 있다. 생사에 색을 넣어 짜는데 얼마나 섬세한 솜씨와 끈기있는 노력이 필요한지 누구나 잘안다. 생사는 장래를 약속하고 있으며 한국문화가 얼마나 섬세한지 잘 설명해준다.
이미 기원초에 한국인들도 생사를 생산했다. 구리제품도 매우 발달했었으며 식기는 색이나 조화면에서 완벽한 것이다.
이것과 잔·수반들은 기하학적으로드 완벽하다. 쇠장식품이 정교한 평해의 강롱둥 아름다운 가구가 전시강에 자리잡고 있다. 철판에 금·은장식을 붙여넣은 모습이 아주 우아하다.
현대도자기는 다소 조잡한 편이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4, 5백년전에 만든 것으로 그림들이 아름다운 희색 칠보로 덮인 것들도 보인다. 수세기전부터 한국도자기에 미친 일본인들이많다. 나전박은 나무상자·구리장식이 달린 나무장롱·자개박은 옷장등은 우아한 면에서나 그 멋으로나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
다소 기계적이기는 하나 동물그림이나 글자로 장식된 발들은 타인이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가정장식품이기도 하다. 나막신도 전시돼 있다. 이는 높이 10cm정도의 나무 2개를 움푹 판 것으로 비올 때 신는 신이다. 귀여운 부인용 신발 「컬렉션」도 전시돼 있다.
보석류·금실이 박힌 향로·나무손잡이가 달린 호화로운 칼·경옥·가지각색으로 장식되고 갖다붙이고 자르고 조각된 금속제품들도 전시돼 있다.
삼베로 만든 상복차림에 원추형으로 아랫부분의 직경이 1m나 되는 갓을 쓴 남자·평상복및관복읕 입은 관리·공작깃털장식모자에 선명한 빛깔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마네킹」도 있다. 장군복강인데 금속으로 장식된 주홍빛 이중천으로 만든 옷도 있다.
한국관 앞에선 뫙궁의 호화로운 방의 모조품도 보여주고 있다. 난간과 계단이 있고 가운데는 뼁둘러서 사람이 다닐수 있도록 만든 장방형의 건물. 용마루에는 3둥분하는 곳마다 흙으로 구운 괴상한 동물들을 얹어어놓았다.
대들보는 조각된 것에 백·흑·청·녹색등으로 칠해져있는데 한국의 눈부신 태양에 잘 어울려 육중한 지붕을 가까이서 보면 가볍게 해주는 효과를 낸다. 이처럼 한국건축은 변화가 있고 재치있게 자연미를 이용하면서 퐁경을 보다 미학시키며 또 풍경이 건축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에는 중국식 문인 영은문이 있었는데 우둔한 애국주의때문에 이 문을 부수고 「유럽」식 육중한 「스마일」의 것으로(현독립문) 바꾸었다.
내눈에는 이것이 차라리 야만스러웠다. 예술문화의 파괴는 어디나 있는 일.
한국인들은 자연을 알고 미화할줄 알며 수를 놓거나 그려 이를 명주비단에 옮길줄도 안다. 풍경을 수놓은 병풍등은 중국보다드 세심한 관찰력이 있어 환상장적이다. 금박을 입힌 나무부처상은 연민을 깊이 표현한다. 전시된 조각품은 얼마되지 않는다. 다른 「켤렉션」에서 찾아보기 힘든 몇점의 그림들과 이번에 전시된 그림들을 복사, 「캐털로그」를 만들었으면 하는것이 나의 소망이다.
이것은 7∼8세기에 일본인들을 가르친 이나라 예술의 첫번째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진열장에 책을 전시하고 있다. 종이의 질은 아름다우며 두껍고 질기고 심지어 무명실 올까지 들어가 있고 밋밋하고 반질반길하며 상아빛이 나고 있었다. 크기도 여러종류이며 우아하고 검소하며 글자만 보아도 뜻을 알 것같다. 책수집가들에게는 진귀한 품목이 될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인쇄술과 화려한 문학이 있었는지 잘알려져있지 않다. 단지 다시한번 말하고자 하는것은 5세기 이전에 목판인쇄를 했으며 1403년 아니면 그 이전에 이동식 인쇄술로 책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한국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겸손의 교훈이 아닐까? 몇년전만해도 「유럽」은 이나라를 야만국으로 취급하려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눈앞에 여러가지면에서 우리를 앞선, 특히 현대세계의 영광이라 할만한 인쇄술에서 섬세하고도 복잡한 문화유산을 전시합으로써한국온「유럽」인들에게 최초로 국위를 자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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