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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학자가 본 한국의 고대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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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아시아」제 민족문화의 공통성과 특수성』을 주기로 하는 국제학술회계가 17∼19일 영남대 경산「컴퍼스」에서 열리고 있다. 개교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이번 학술회의에는 반중규(중국문화학원)·이수공·당미군(이장 대만대)교수 등 중국학자와, 삼상차남(동경대)·전촌원징(전수대)·정상수웅(동북 대)·전촌회징(구주대)·마연동일(동경도립대)·북야경평(충호대)교수 등 일본학자, 전해종 교수(서강대)등 한국학자 8명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의 발표논문 중 삼상차남 교수의 『무령왕릉출토의 중국 도자에 대하여』, 정상수웅 교수의 『고대한국문화의 특징』, 전촌원징 교수의 『반가사유상의 전등과 수용』등 한국관계 3편의 강연을 소개한다.

<중국문화 수용의 차이>정상수웅(일본 동북대 교수)|한자를 변형 발전시킨 한국|일선 단일 생략문자로 정착
일본문화와 대비해 고대한국문화의 특징을 비교하는 것은 아직 연구수준이 미약한 상태다. 그러나 중국문화를 수용하는데서 원시·고대에 걸쳐서 한국과 일본은 유사한 부문과 상이한 단계가 두드러진다.
이 같은 예에는 ▲한자의 유입 ▲연호와 기연의 사용방법 ▲불교수용과 고유신앙관계 ▲도성 ▲고대왕권의 성립과정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한자의 경우, 고대한국은 삼한·삼국시대 등 다수의 작은 나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에 획일적인 수용이 불가능했다. 고구려는 생략문자, 신라는 결합문자 등으로 변형 발전시켰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평안(헤이안)시대이후 단일한 생략문자를 정착시키고 있다.
불교수용에 있어서도 한국과 일본은 공통성과 특수성을 함께 보이고 있다. 신라의 경우, 화랑도의 지도이념에는 유불선의 삼교가 포함돼 있는 등 외래신앙을 함께 포섭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자체의 고유 신이 불에 구제를 구하는 신앙의 예속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도성의 경우도 한국은 고유문화를 계승하면서 발전했지만, 일본은 전통문화와 단절된 채 새 문화로 전환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에 남아있는 산성·옛 고구려 땅의 장안성 등은 촌락문화를 중심으로 했던 한국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일본은 성의 개념이 중국 도성제를 모방한 것이었기 때문에 촌락형태의 도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무령왕릉 출토품의 특징>삼상차남(동경 대 명예교수)|신라·고구려고분과 달리|출토자기는 모두 중국제
무령왕릉의 출토품을 보면 6세기 전기의 백제왕실에서는 중국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김관식은 전통적인 문화의 바탕이 보이지만 그 밖의 중국 공예품과 매개제도 등은 같은 시기의 고구려 신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이다.
도자기는 모두 중국제인데 그중 두개의 청자 양각 연판문 육이호는 절강성 영가현 혹은 덕청현 가마의 제품인데 특수한 의예 용구로서 상용계급의 물건이었을 것이다. 목이 긴 흑유사이병은 역시 덕유현 가마의 제품으로 비록 거친 것이긴 하나 진진한 물건이다. 6개의 청자분은 청백자를 연상케 하는 양품으로 영가현 가마의 제품일 것이다.
중국도자기가 함께 나온 원주·천안 및 경주 고분에서는 그들 고유의 토기가 많이 있었는데 무령왕릉엔 단 한 점도 없다. 뿐더러 왕릉의 구조와 그에 사용된 화문초 및 묘지와 묘권 등이 중국 남조(양)것과 공통되는 것이다.
이같이 중국문화에 강한 관심을 보였음에도 중국 그들 도자기는 백제고유의 도자기에 별 영양을 미치지 못했다. 즉 중국도자기의 질이나 기술이 너무 월등했던 탓인지 백제사람들의 전통적 관념이나 미적「이미지」와 동떨어져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백제 인이 중국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 선택성을 나타낸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당시 고분시대후기로 접어드는데 무령왕릉과 같은 직접적인 수용방식을 취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한반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미륵반가상과 양국관계>전촌원징(일본 구주 대 교수)|화랑과 함께 신라의 구심점|6세기 때 백제서 일본으로
한 손을 뺨에 대고 한쪽 다리를 무릎에 얹고 생각에 잠긴 우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젊었을 때의 「실달다」태자상이다. 「실달다」는 인간의 생로병사 문제에 번뇌하다 출가한 것이다.
반가상은 북위에서 시작된 교각의 미륵보살상이 북제에선 의좌상으로 나타나고 뒤에 사유상으로 발전된다. 미륵보살은 앞으로 인간세계에 하생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이상적인 국토가 되게 한다는 제2의 석가.
반가사유상은 북위에서 수에 이르는 2세기 사이에 만들어져 미륵상으로 변하지만 태자상 신앙과 미륵신앙이 동시에 포함돼있다. 그 점은 한반도의 삼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현존하는 반가상 26점 중 고구려가 l구, 백제가 6구, 신라가 10구를 헤아려 신라의 비중이 단연 크다. 신라에서 반가상은 6∼7세기에 걸친 약1백년동안에 집중되는데 특히 화랑의 미륵신앙과 결합돼있어 주목된다. 즉 신라는 화랑의 사명과 미륵신앙의 이익이 겹쳐져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본에 있어 반가상신앙은 6세기초에 백제에서 전해진 후 신라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대화정권의 악덕태자가 죽자 신라에 있어서의 화랑과 그 불교신앙의 영향을 받아 「성덕태자신앙=반가상」으로 번졌다. 즉 반가상을 통해 두 나라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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