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경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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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모든 게 옛날이 좋았던 것 같다. 날씨도 그렇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삼한사온이 알맞게 추위를 견디게 만들었었다. 여름이 아무리 길어도 복중만 잘 견디면 되었다.
요새는 삼한사온도 없고 여름이 따로 없다. 대구는 벌써 이틀째 30도를 기록했다. 서울도 어제 26도를 웃돌았다.
5윌 이라면 예 같으면 온 세계가 한창 봄을 즐길 때다.
『공상은 당신에게 여름철의 온갖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이슬을 머금은 잔디, 또는 가시 붙은 가지에서는 5월의 온갖 봉오리와 꽃들을….』
이렇게「키츠」는 5월에 여름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이제는 여름을 기다리는 것은 철없는 어린이들밖에 없다. 긴 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관상대는 아직 올 여름이 얼마나 더울 것인지를 짐작치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조짐이 불길하기만 하다.
지난 3월에 미국의 기상학자「브라이슨」박사는『올 여름에 미국은 사상최악의 가뭄을 겪게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바 있다. 혹서가 계속되는데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미국사람들만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사람들의 겁은 더 심하다.
영국사람들은 비오는 날이면 『러블리·웨더』(날씨가 좋군요)하는 인사를 나눈다. 거의 매일같이 비가 오는 날씨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든다.
그것을 이겨내자면 비가와도 좋은 날씨라고「유머」로 웃어넘기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새는 비가와도 『러블리·웨더』라고 말하기를 꺼린다는 얘기다. 지난해에 톡톡히 혼이 났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여름에도 짙은 회색「플란넬」양복을 입는다. 신사다운 체모를 갖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더워도 20도를 넘는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던 영국도 지난해에는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달일 엄습한데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었다. 심지어는『지금이야말로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정신을 되찾을 때』라는 신문사설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영국의 기상이 올해도 심상치가 않다. 「키츠」같은 시인이 못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까.
더위도 예전에는 혼자 찾아왔다. 요새는 으레 가뭄을 함께 데리고 온다.
아직은 더위도 견딜만하다.
그러나 서울의 비탈 위에 선 어느 여학교에서는 아예 음료수를 학생들에게 휴대해 오라고 이르고있다. 벌써부터 물이 귀한 것이다.
여름이 되자면 아직도 두 달이 더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계절이 뒤틀려 시민 생활의「리듬」이 결딴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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