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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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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2세기 말 관료의 후예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급기야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국왕조차도 한낱 괴뢰 적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무단정치를 행하였다. 두 왕을 폐하고 네 왕을 옹립한 일이나, 동생 최충수의 딸이 태자비가 되어 권력이 그 곳으로 분산되려 하자 동생을 살해한 일만 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만 하다. 그는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3천의 병력을 가진 「도방」이란 이름의 사병집단을 만들었다.
최충헌의 정권을 이어 받은 아들 우는 다시「야별초」를 만들었다. 수도 일원의 야경·순위를 위한 조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병집단의 확대에 불과했다. 이 야별초는 그 뒤 더욱 병력이 강화되자 좌·우별초로 나뉘었으니 말하자면 이별초가 된 셈이다.
이와 같이 반도에서 최씨 정권이 계속 되는 동안 대륙에서는 몽고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변동이 일어난다. 미구에 그들은 고려 침략을 시작하니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끈질긴 항쟁을 계속한다. 이 때의 주력이 좌·우별초였음은 물론이다.
또 원의 침입 이후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많은 고려 군 가운데에는 탈출에 성공한 수도 적지 않았으니 이를 모아「신의 군」이라는 부대가 편성된다.「좌·우별초」와「신의 군」의 셋을 일컬어 이른바「삼별초」라고 한다.
우의 뒤를 이은 아들 항을 거쳐 다시 그의 아들 의에 이르도록 최씨 정권이 4대 60년이나 계속되는 동안에 삼별초는 우익의 임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의의 암살을 계기로 고려는 몽고와의 항전을 단념하고 출 육 하자 삼별초는 설 당을 잃게 된다.
그들의 주력은 배중손의 지휘하에 출 육을 거부하고 남하, 진도를 거점으로 농민 군과 합세하여 대몽 항쟁을 계속한다. 진도가 원·여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자 김 통정은 그 여중을 몰고 다시 제주도로 들어가 최후의 공방을 시도한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니 그 결과는 정해진 바나 다름이 없었다. 이리하여 전후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전조의 정사『고려사』는 배중손·김 통정 등의 사실을 반역 열전으로 기록했다. 정부가 이미 원의 부마 국으로 사대의 비를 다하기로 한 이상, 이에 항명하여 투쟁한 그들이 전통적인 정통론으로 보면 이단이 아닐 수 없다. 항전이 있은 지 7백년,『고려사』가 편찬된 지 5백년 만에 제주에 삼별초의 위령탑이 세워진다.
역사사건이란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사건이라도 주도에 다라 그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아니, 마땅히 달라야 옳을 것이다. 또 역사의 서술이란 현재의 처지를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이를 사관이라 불러도 좋다.
삼별초의 위령탑, 우리에게 자주가 강조되는 마당이니 7백년만의 신원이 있을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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