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과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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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정치의 세계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모든 정치인들은 선거를 사이에 두고 그런 씁쓸한 체험을 한다. 선거를 앞두고는 누구나 눈부신 현상주의자로 정열을 불태워 이를 공약 안에 담는다. 그러나 이상주의는 어느새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그는 회색 빛의 현실 위에 적막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 「카터」는 선거 「캠페인」을 하면서 주한 미군의 철수를 그의 주요 당면과제로 제시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의 이와 같은 공약엔 수식어와 사족이 붙기 시작했다.
정작 당선자의 입장이 된 「카터」는 언어의 기교에 집착하게 되었다. 최근 그는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은 「서서히, 조심스럽게」 철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번 주 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다시금 『한국과 일본에 대해 미국은 두 나라를 혼란시킬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카터」의. 한반도 정책은 이제야 뼈에 살이 붙어 그 형상이 드러나는 것 같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민주당 정권에 대항해서 한국 동란의 신속한 종결과 평화정착을 공약했었다. 휴전이 성립된 것은 물론 그와 같은 「공약」이 강력하게 작용한 것이긴 했지만, 휴전의 결과는 미국이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문제의 미봉에 지나지 않았으며, 문제 자체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이상주의는 현실의 수렁에서 발을 빼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월남전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존슨」대통령도, 「닉슨」대통령도 월남전의 신속한 종결과 평화정착을 공약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늘의 사태를 빚어냈다. 선실에 발을 딛지 않은 이상주의, 이상이 없는 현실주의, 그 어느 쪽도 무위한 것임을 역사는 교훈하고 있다.
「카터」는 그 점에 있어서는 신중한 정치인인 것도 같다. 그는 이상주의의 바탕 위에서 현실의 살얼음판을 조심스럽게 나가려는 결의에 차 있는 것 같다.
「카터」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면에서는 그 말을 거두절미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카터」는 그의 이상자체를 변질시키지는 않고 있다. 다만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의 기술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카터」는 이제 동맹국의 한 주축인 일본의 반응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주한미군이 없는 「아시아」의 평화는 유리 「컵」속의 그 것처럼 평가하고있다.
「카터」의 과제는 이런 현실을 그의 이상주의에 어떤 격식으로 대입시키느냐에 골몰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현실 또한 변수의 구실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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