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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테니스 황제 애거시의 사랑과 전쟁 "나는 줄곧 테니스를 혐오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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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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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애거시 지음
김현정 옮김, 진성북스
614쪽, 1만9500원

2006년 7월 US 오픈, 은퇴 무대에 선 서른여섯 살의 안드레 애거시는 늙고 지쳐 보였다. 2차전 상대는 스물한 살의 당찬 신예 바그다티스. 노장의 패배를 예상한 관중 앞에서 애거시는 무서운 투혼으로 3시간 48분의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둔다. 이 책은 바로 그 날, 21년간 테니스 코트를 누빈 한 남자의 마지막 승리의 날(그는 3차전에서 신인 베냐민 베커에게 패해 선수생활을 마감한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시합을 앞두고 긴장과 두려움에 “제발 이 상황이 끝나기를” 기도하며 샤워실 벽에 기대 울었다고 썼다.

 1989년부터 2006년까지 프로 테니스 선수로 활동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4대 메이저대회를 한해 이상 걸쳐 우승) 달성, 메이저 우승 8회를 포함해 60회 단식 정상 기록을 남긴 테니스 스타 안드레 애거시의 자서전이다.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며 하루 2500개의 공을 치던 어린 시절, 유명세에 시달린 20대, 여배우 브룩 쉴즈와의 결혼과 이혼, 테니스 여제 슈테피 그라프와의 재혼 등의 사연이 담겼다. 하지만 한 재능있는 선수의 회고록이라기보다 “평생에 걸쳐 테니스 코트 안팎에서 정체성과 평온함을 찾아 헤맨 남자의 고통스런 연대기”(로스앤젤레스 타임스)로 읽힌다.

 사람들은 애거시의 경쟁자로 샘프러스를 꼽는다. 하지만 그가 평생에 걸쳐 싸운 상대는 자신이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어둡고 비밀스러운 열정 속에 테니스를 줄곧 혐오해왔다”고 말한다.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죽을 만큼 외로웠고 승리는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으며, 자기파괴 본능과 완벽주의가 스스로를 괴롭혔다.

 어두운 이야기만 담긴 것은 아니다. 스스로 ‘내 정체성의 핵심’이라 말하는 ‘탈모’에 대한 묘사에는 쿡쿡 웃음이 터진다. 가발이 벗겨질까 신경쓰다 진 시합, 브룩 쉴즈의 권유로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기로 결심한 사연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심지어 비장했던 바그다티스와의 경기 중에도 그는 훨훨 나는 상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한다. ‘아 이 녀석은 머리숱만큼이나 놀라운 열의를 갖고 있다.’

 문장이 유려하다. 책 말미에 애거시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J R 뫼링거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가장 혐오했던 천재가 유능한 작가와 함께 ‘기말고사 공부하듯’ 삶을 복습하며 찾아낸 결론은 이거다.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된다. 인생은 양극단을 오가는 테니스 시합이다. 승리와 패배, 사랑과 증오…. 일단 내 안의 양 극단을 인식하고 나면 그것을 끌어안거나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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