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찌질하다'와 '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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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식구들이 모두 처가에 갔다. 오늘은 안방보다 넓은 거실에서 나 홀로 잠을 청해야 한다. 밤 12시 뉴스를 보고 나서 거실의 불을 껐다. 환기를 위해 베란다 쪽 문을 5㎝ 정도 열어놓았는데 밖에선 밤바람이 조금 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부드럽게 발을 디뎠다.

 ‘달그락달그락’ 하는 소리가 귓속을 슬며시 파고든다. 베란다 쪽에서 나는 것 같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니 베란다 창의 블라인드를 치고 걷을 때 사용하는 줄이 바람에 흔들리며 창틀을 규칙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은 작고 단단한 물건이 잇따라 부딪쳐 흔들리면서 맞닿는 소리를 뜻한다. ‘달그락달그락’보다 말맛이 더 센 느낌을 주려면 예사소리 말고 된소리를 쓰면 된다. 바로 ‘딸그락딸그락’이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센말과 여린말이 있어서 어감을 차이 나게 표현할 수 있다. ‘진득하다’ ‘찐득하다’도 있다.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라는 뜻의 ‘지질하다’란 단어가 있다. “제가 좀 소심하고 지질한 스타일이라서 쿨하고 의연한 사람들을 늘 동경해 왔어요” “이 영화에서 그는 못나고 지질한 남편 역을 잘 소화해 냈다”처럼 쓰인다. 이 ‘지질하다’만 사전에 나와 있어서 그런지 ‘찌질하다’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찌질하다’는 ‘지질하다’의 센말로 보면 된다.

 “쫄 게 뭐 있어. 이젠 김정은이 코앞까지 왔다 갔다 해도 신경 안 써. 일하기 바빠 바다 건너 북한 있는 것도 까먹을 정도야.” 이것은 연평도의 한 주민이 한 말이다. 여기 나오는 ‘쫄다’도 마찬가지다. 속되게 ‘위협적이거나 압도하는 대상 앞에서 겁을 먹거나 기를 펴지 못하다’를 뜻하는 ‘졸다’의 센말로 보면 된다.

 인터넷에는 ‘찌질하다’ ‘쫄다’를 쓸 수 없는 말이라고 설명해 놓은 데가 많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쓸 수 없는 게 아니다. 더구나 이 두 단어는 우리말에서 벗어난 말도 아니다. 사전이 미처 싣지 못한 단어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최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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