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색만 낸 「삭감」새해예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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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예산편성도, 예산심의도 동맥경화증에 걸려있다. 세계경제의 기조가 바뀌어 내년도 국내경제 전망이 크게 달라질 전망임에도 불구하고 새해예산은 초지일관 팽창·경직 골격으로 확정되었다. 정부가 77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낼 때만 해도 세계경기는 상승국면에 있었으며 이것이 내년에도 계속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경기의 침체가 두드러져 내년 경기가 금년보다 후퇴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수출입의존도가 80%가 넘는 한국경제는 해외경기의 변모가 그대로 공명 확산된다.
내년 국내경기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어려울 전망이다.
수출의 둔화에 따라 내수경기의 자극이 불가피한 여건이다. 설비투자도 환기시켜야 한다. 이럴 땐 예산규모와 세금을 줄이는 것이 교과서적 정석이다. 이른바 재정의 경기조절기능인 것이다. 그러나 내년 예산엔 급변하는 국내외 여건에 대응하는 탄력성이 매우 미흡하다. 예산규모는 계속 팽창으로 치닫고 세부담은 증가일로에 있다. 내년 예산규모는 금년 추경보다는 17·7% 늘었지만 본 예산에 비해선 31·3%증가다. 내년의 경상성장율 24·3%보다 훨씬 높다.
내국세부담은 74년에 63·5%, 75년에 41·0%, 76년에 33·1%가 는데 이어 내년에 다시 21·5%가 는다. 77년 내국세 목표 1조6천3백76억원은 금년 본예산에 비해 35%가 증가된 것이다.
사실 세출예산의 34·8%를 국방비로 써야하는 형편에선 구조적으로 예산이 경직되게 마련이다. 싸우면서 건설하려니 경기가 좋건 나쁘건 세금은 점점 더 거두어야하고 국민가계에의 따뜻한 배려엔 눈을 질금 감아야하는 것이다.
또 철도나 한전 등의 부실경영, 늘어나는 정부의 회전의자와 관용차 등을 모두 뒤치다꺼리 해야하니 예산과 세금이 안 늘 수 없다.
예산의 구조적 경화증 때문에 국회의 심의 폭도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산은 숫자로 나타낸 정치방향이며 정책수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기조를 손대지 않는 한 예산도 크게 손질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가 행정적 차원에서 마련한 예산을 국회가 납세자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판단해도 별 손댈 것이 없다는 것도 다소 이상스러운 일이다. 76년 추경은 무수정 통과되었다.
행정부와 국회는 예산을 보는 입장과 차원이 다른 것이며 거기에 바로 예산을 국회에서 심의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번 국회심의에서 깎인 예산은 모두 1백57억5천6백만원. 정부가 제출한 규모의 0·59%로서 국회의 한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산 삭감규모도 그렇지만 그 내용을 보면 더 한심스럽다.
정말 깎을 것은 그대로 두고 추경 등으로 살아날 것만 깎았다. 즉 한전출자 50억원, 장기차입 이자 32억원, 각종 이차보상 20억원, 철도사업전출금 15억원 등은 이미 세출요인이 발생한 것이므로 내년 예산에서 아무리 깎아도 언제든 예산에 다시 반영 안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의원회관 8억6천만원, 사격대회경비 5억원, 참전용사 초청비 5천만원 등 소모성 경비를 국회에서 늘려 놓았다. 규모상으론 세출을 1백57억원이나 깎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깎으나 마나 한 것이다. 추경 요인만 만들어 놓았다.
세입에서도 예탁금수입을 50억원, 세외 수입을 25억원이나 깎았지만 이것은 예산을 깎는다고 해서 실제 세입이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 부담은 예산상의 세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법에 의해 좌우되는데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부담경감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번 세제개혁의 심의에서 국회가 너무 이해성이 많은 것 같다.
정치적 판단에 의한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대담한 부담 경감이 기대되었으나 소득세의 쥐꼬리만한 손길로 만족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정부의 과소세수추계에 비추어 현재 예산에 계상된 세수목표만 거두려면 세법을 훨씬 더 손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급봉투에 대한 세금이 그나마 더 가벼워지고 내년 세수목표가 1백7억원이 준 것도 국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국회가 의원세비를 올리고 의원회관 비용을 늘리는 것쯤은 너그럽게 봐주고 또 감사해야하겠는지 모르겠다. <최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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