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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화제서 만난 안성기·야쿠쇼 고지

중앙일보

입력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얼굴, 두 '국민 배우'가 만났다. 지난 3일 오후 5시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잔디밭에서 한국의 안성기(51)와 일본의 야쿠쇼 고지(役所廣司.47)가 지난 2일 개막한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주최로 '한.일 두 국민 배우, 영화와 인생을 논하다'라는 대담을 했다.

'셸 위 댄스''우나기'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고 이번 영화제 개막작 '도플갱어'의 주연이기도 한 야쿠쇼는 영화는 물론 사생활에서 보여주는 성실함과 편안하고 친근한 인상 등으로 안성기와 '닮은 꼴'로 일컬어져왔다.

두 배우는 1995년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잠자는 남자'에 같이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었지만 공식적인 대화 자리가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소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2백여명의 관객과 취재진이 몰려들어 이들의 폭넓은 인기를 실감케 했다. 생일(1월 1일)마저 같은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국민 배우답게 진지하면서도 관록과 재치가 넘치는 태도로 임해 팬들에게 즐거운 저녁 시간을 선사했다.

▶안성기=야쿠쇼씨는 '잠자는 남자'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 영화를 찍을 때도 일본에서 우리 둘이 비슷하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별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하고 부담없는 분이에요. 그래서인가, 야쿠쇼씨를 만나면 왠지 이 분이 한국말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웃음)

▶야쿠쇼=안성기씨를 소개받을 때 "이 사람이 한국에서 널리 사랑받는 국민 배우"라고 들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국민 배우라는 말은 없습니다만, '안성기=국민 배우'라는 말이 참 설득력있다고 느꼈지요. 그런데 국민 배우 하면 왠지 평소에 나쁜 일도 절대 하지 않아야 하고 청렴결백해야 할 것 같아요. 전 그럴 자신이 없는데….(웃음)

▶안성기=그렇죠. 사실 국민 배우라는 말은 상당히 부담감을 주는 단어죠. 지난 2일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선수가 56호 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을 때 한 방송사에서 이선수 특집을 하면서 저와 조용필씨를 인터뷰하더군요. '국민 타자'니까 '국민 배우'와 '국민 가수'도 같이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일동 웃음) 국민 배우라고 저를 칭할 때마다 쑥스럽긴 하지만 아역 시절부터 47년간 영화라는 한 우물에 몰두하는 성실한 모습과 평탄한 가정 생활 등을 잘 봐주신 덕이 아닐까 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야쿠쇼=안성기씨가 '잠자는 남자'에서 맡은 역할이 처음부터 끝까지 잠만 자는 남자였지요. 그래서 촬영 당시 한국에서 "고작 잠자는 연기 하러 일본까지 가느냐"는 핀잔(?)도 더러 들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안성기씨가 그 영화에 출연한 이유는 한.일 영화 교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국민 배우라는 호칭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성기='잠자는 남자'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내내 잠만 자는 역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몰라요. 그래도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어 병원을 찾아가 실제로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를 관찰했어요. 식물인간이라도 외부 자극에 미세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잠을 자더라도 조금씩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야쿠쇼=저도 '도플갱어'에서 1인2역을 해야 했기에 도전 의식을 많이 느꼈습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과 능청스럽고 폭력적인 사람을 동시에 연기해야 했거든요. 한 영화에 야쿠쇼가 두 사람이나 되니까 관객들이 지겨워하지 않을까 걱정마저 되더군요. 그래도 영화라는 게 워낙 내게 여러가지 인격을 표현할 것을 요구하는 작업이니까 그중 두 개만 뽑아서 연기하자, 이렇게 맘 먹었죠.

이때 객석에서 두 배우에게 "대표작을 꼽아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워낙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에 출연해온 터라 둘 다 "가장 미운 질문"이라며 껄껄 웃었다. 안성기는 성인 연기자로 인정받은 계기가 된 '바람불어 좋은 날'(감독 배창호)과 '만다라'(임권택), '고래사냥'(배창호)을, 야쿠쇼는 TV.연극을 주로 하던 시절 영화의 참맛을 알게 해준 '잠자는 남자'를 꼽았다.

'닮은 꼴'에게도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었다. 바로 주량.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술을 즐기며 한번 마시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마신다."(야쿠쇼), "두 잔까지는 확실하게 잔을 셀 수 있다."(안성기)

약 한시간 동안 진행된 대담은 마침 이 호텔 식당에서 인터뷰를 마친 박중훈씨가 나타나면서 폭소로 마무리됐다. 이날 밤 안성기씨와 함께 서울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던 그는 두 배우에게 "한국 여성과 일본 여성 중 누가 더 아름다우냐"는 기습 질문을 던졌다. 두 배우의 대답은 똑같았다. "당연히 한국 여성이죠!"

부산=기선민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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