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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조개·개조개 … 쫄깃하고 달콤 국물은 피로회복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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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호 22면

1 가리비와 개조개는 계절에 관계없이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봄이 왔다. 기분이 나른해졌다. 꽃이 피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햇살이 제법 따사롭다 느껴졌다. 두통까지 합세했다. 어이쿠야.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자 손을 댈 수도 없을 만큼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매일같이 아기는 돌봄을 필요로 했고, 끼니에 맞춰 밥을 지어야 했으며, 게스트하우스를 오가는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야 했다. 어지간하면 병원에 가지 않으려는 성격이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14> 통영 조개

처음 찾았던 곳은 한의원이었다. 침을 맞고 왔지만 별 차도는 없었다. 밤이 되자 더욱 힘이 들어 다른 한의원을 다녀왔지만 잠을 쉽게 이룰 수는 없었다. 다음날 찾아간 내과의 의사선생님이 “가벼운 장염 기운이 있고 스트레스로 인해 근육이 긴장된 상태”라고 진단했다. 평생 처음 ‘링거’라 부르는 영양주사를 맞고 나니 훨씬 나아진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까지는 말이다.

이튿날 똑같은 통증을 느끼자마자 이번엔 정형외과에 갔다. 한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만성피로로 인한 근육경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른 쪽 팔에 근육이완제를 맞으며 가만히 생각을 해봤다. 뭘 해왔었기에 만성피로라는 딱지를 내 몸에 붙이게 되었을까.

좀 더 전문적인 곳에서의 진단과 치료 덕분이었는지 내 상태는 꽤 호전되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전처럼 아기에게 ‘아빠 전용 놀이’를 해줄 수도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봄이 오면서 당신 몸에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가 녹아 내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날씨가 풀리며 굳어 있던 몸이 이완되는 가운데 유독 뭉쳐 있는 부분이 통증을 유발한다는 해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뭘 좀 잘 먹어야 얼른 낫지 않겠느냐는 얘기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내 신체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그 순간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가 먹고 싶은 게 없는 상태라니.

2 물이 빠지는 봄날 쉽게 볼 수 있는 바지락 캐는 장면 3 탕을 끓여 먹을 거라는 말에 조개를 골라주는 아주머니 4 큼직한 개조개의 속살은 꽤나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선사한다

봄에 꼭 먹어줘야 한다는 새조개
며칠을 약 기운에 의지해 ‘정상적으로 보이는’ 생활을 해나가던 어느 날 아내가 조개 이야기를 꺼냈다. 봄이면 통영 이곳저곳에서는 바지락을 캐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는데, 마침 아내의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머니들이 하루 종일 바지락을 캐더라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통영에 내려와 처음 봄을 맞이하던 어느 날 썰물로 맨 살을 드러낸 갯벌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무한대로 묻혀 있을 것 같은 바지락을 캐는 것을 구경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지락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해도 그것을 캘 수 있는 건 어업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된다. 시기에 맞춰 종자를 뿌리고 무단 채취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동네에 따라서는 체험비(보통 1만~2만원)를 받고 계원이 아닌 사람도 채취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어쨌든 아내는 그 모습을 보고 이제 바지락을 비롯한 조개가 제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고, 이어서 조개가 피로 회복에 좋다는 사실 역시 연상해 낸 것이다. 역시 아내는 훌륭한 사람이다.

날이 참으로 화창하던 어느 날 점심 무렵, 잠깐 여유를 낸 아내와 함께 시장에 나갔다. 조개를 판매하는 곳에서 무얼 먹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 무렵 시장에 많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새조개. 생김새가 꼭 새의 부리모양을 닮았다 해서 새조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놈은 봄에 꼭 먹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터였다. 시장을 오갈 때마다 그 우람한 모습으로 언제나 시선을 잡아끌던 개조개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가리비와 친숙한 바지락도 한 움큼 담았다.

날 것 그대로의 바다를 후루룩
퇴근 후 돌아온 아내는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 마늘과 쪽파를 넣고 끓인 후 아주 약간 소금으로 간을 해 뚝딱 조개탕을 한 그릇 만들어냈다.

가장 먼저 집은 것은 개조개였는데, 겉모습처럼 속도 꽉 차 있었다. 육질이 꽤나 쫄깃했고 맛도 진했다. 조개에는 기대하기 힘든 포만감이 입안에 가득했다. 이어서 새조개를 입안으로 갖고 갔다. 아아 이런 맛이었구나. 나는 잠시 눈을 감기까지 했다. 탄력이 느껴지는 부드러움 속에 숨겨진 달콤함이 감탄을 이끌어낼 정도였으니까. 이런 맛을 가진 조개도 있었구나 싶은 마음에 괜히 흡족해지기도 했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가리비와 바지락도 열심히 먹었다.

하지만 조개탕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 해도 그 국물에 있다. 진액이 전부 풀어진 그 짭짤하고 시원한, 그래서 그대로 바다의 맛이라 해도 좋을 그 국물을 후루룩 마시니 “하아” 하는 한숨이 나왔다.

사실 나는 음식의 효능, 그러니까 이걸 먹으면 피부에 좋고 저걸 먹으면 체력에 좋고 하는 식의 이야기에 크게 감흥을 느끼는 편은 아니다. 실제 눈에 띌 정도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래서 아내가 조개탕을 끓여준다고 했을 때도 그저 그 마음이 고마웠을 뿐이지 그것을 먹음으로써 어떤 극적인 효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한 끼로 내 몸이 좀 더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따져 보자면 조개가 많이 함유하고 있는 아미노산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그런 화학적 작용에 대한 고찰은 내 건강을 해치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요즘 통증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대신 그것을 춘곤증이 대체하고 있어 여전히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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