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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제자 김은호>|<제52화>서화백년>(62)|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옥경산인 윤영기>
옥경 윤영기 옹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서화미술 회」의 전신「경성 서화미술 원」을 만든 사람이다.
「경성 서화미술 원」이 설립될 때인 1911년 3윌25일 매일신보는『윤영기·방한덕씨 등의 발기로 북부 두석동(지금 중학동 근처)에 서화미술 원을 설립하고 지난 22일에 개원 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근배씨로 장재의 임을 추천하고 우선 경비 5백원을 청구하므로 이씨는 2백50원을 먼저 내놓았으나 장차 이 장재의 임무를 사면코자 한다더라』고 짤막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어서 4월1일자에 『 일당 이완용·낭전 조중응·용헌 조민희 제씨가 서화미술 원에 대하여 각기 보조금을 출연하였으므로 해 원에서는 그 사무소를 일신 수리하는 중이라 더라』는 속보가 나왔다.
신문에 게재된 「경성 서화미술 원 취지서」에는『옛말에 이르기를 뜻이 있는 사람은 일은 반드시 이루어 놓는다 하였으니 진실로 반드시 그의 정성과 뜻이 있은 뒤에 일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옥경 윤군의 서화 원이 성립하게 된 원인이다. 어떤 이는 비난하기를, 서화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한데 어째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한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글씨와 그림이 문장의 도와 함께 삼절을 이루어 예술분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말이다. 문장을 없앨 수 있다면 서화는 또 어떻게 가볍게 다룰 수 있는가. 군은 소시부터 여기에 정신을 쏟아 늙어서 머리털이 희어지도록 조금도 식어지지 않았다』고 옥경 산인의 끈기를 높이 평가하면서 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옥경은 1909년 남산 왜성 대(통감부) 에서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만난 일이 있다.
한국의 한묵 인사들을 초청한자리에서 옥경은 이등박문에게 미술 원 운영자금을 요구, 그도 재정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등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된「소네·아라쓰께」도 흑심을 품고 서화 회를 표방하여 문학적인 회유정책을 써 가며 정략적으로 놀아나고 있었다.
옥경은 본시 완당 김정희에게 대원군과 함께 난 화를 배우고 다시 대원군에게서 난을 익혀 석파 난을 그대로 구사하던 구한말 상류사회에서 묵 명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가 자나깨나 생각하는 서화미술 원의 독자운영은 자금 때문에 벽에 부닥쳤다.
옥경이 미술 원을 만든 의도는 고금서화를 수집, 진열하여 미술문학 발전에 기대할 수 있는 근대적인 미술관의 기능을 목표했었는데 그의 친구이자 당시의 세도가이던 일당 이완용이 후원하면서 미술원 안에 회원제의 미술 회를 둔다는 조건을 붙여 후진양성으로 기운 것이다.
일당·낭전·용헌이 운영자금을 내놓으면서 서화학도 교육문제를 들고 나와 즉각(19l1년 3윌22일) 20명의 학생을 뽑아 미술교육을 시작했다.
옥경은 경성 서화미술 원 개원 식에서 성사의 심회를『늙은 나이라도 희망만은 크다. 이날을 맞이하니 갑절이나 빛이 난다. 늙은이들로 모인 미술회의 조직을 가지니 봄부터는 붓과 먹이 남은 향기를 풍기리라』(하방단발 복심장, 차일봉영 배유광, 미술 의성 서영회, 춘래한묵동여향)고 시를 지어 기뻐했다.
경성 서화미술 원이 개원된 지 약 반년 후인 9월에 들어 매일신보는 옥경이 세운 서화미술 원의 명칭이 바뀌고 장소도 두석동에서 방교(경기여고)근방으로 옮겼음을 알려주었다.
『이완용씨가 서부방교에 재한 총독부소속 가옥을 차 수하여 경성서화미술 회를 설치하였음은 일반이 공지하는 바이어니와, 조선의 고래 서화골동품을 진열하여 동호자의 관람에 공 한다더라』고 보도했었다. 내가 1912년에 입학한 백목다리(방교)의「서화미술 원」은 바로 옥경이 발기한 경성 서화미술 원을 모체로 해서 6월1일에 정식으로 개교했다.
옥경은 서화미술 원에서 손을 떼고 평양에 가 서화 회를 열었다.
1913월 21일자 매일신보는「평양서 윤영기 옹의 서화 회」라는 제목으로『내30일 하오 1시부터 평양 대화정 화정사에서 도장관·헌법원장·검사장·지방법원장 등의 발기로 내양한당세 초명 서화가 윤영기 옹을 청 격하여 서화 회를 열기로 했는데, 윤영기의 아호는 옥경이고 시서 화에 모두 능하며 특히 난묵은 신묘한 경지에 이른다. 고 대원군 석파태공의 친구로 당세의 명사인 김성근·정학교·김윤식 등 제씨와 경성 한묵계에 명성이 높았으며 목하 이왕직 미술심사 고문이다. 고령 80유 여의 노구임에도 평양 탐승 차 내장했더라』고 보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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