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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입적한 서암 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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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난 29일 열반한 서암 스님은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이 열반송을 묻자 "나는 그런 거 없다"며 "누가 물으면 노장(老長.노승의 존칭) 그렇게 살다 갔다 해라"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이 대목은 겉치레에 연연하지 않고, 한평생 문중도 자기 절도 없이 수행자로만 살아온 스님의 걸림 없는 세계를 잘 보여준다.

서암 스님은 조계종 내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었다. 오로지 참선에만 몰두해왔다. 별다른 문중의 배경이 없이 종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서암 스님에 대한 전국 수행승들의 존경 덕이었다.

그러나 종정으로 있던 1994년에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이 3선 연임을 노리면서 일어난 종단 분규 때 원장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가 전국승려대회의 불신임으로 종정에서 물러난 것은 오점으로 남아 있다.

당시 조계종의 내분에 대한 실망인지 아니면 참회의 뜻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님은 '탈종(脫宗)'을 선언한 뒤 경북 봉화군 태백산 자락에 '무위정사'라는 토굴을 짓고 약 7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토굴의 이름은 이해관계에 얽힌 세상과는 달리 스님으로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산다는 뜻이다. 그러다 2001년에 봉암사 수행승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자신이 승풍을 세웠던 봉암사로 들어가 조실로 말년을 보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스님은 비구계를 받은 38년에 일본으로 유학, 신문배달과 짐꾼 등 바닥생활을 하며 고학했으나 폐결핵에 걸려 2년 만에 귀국했다. 이때부터 전국 선원을 돌며 '생사의 근본도리'를 화두로 참선 정진에만 몰두했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한 데 크게 실망한 스님은 징병.징용에서 돌아온 청년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불교청년운동을 펴기도 했다.

스님은 29세 때 계룡산 골짜기에 있는 천연동굴에 들어갔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바위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목숨을 건 정진으로 스님의 육체는 뼈만 앙상했으나 의식은 더욱 맑아져갔다.

그러던 한 순간 스님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본무생사(本無生死)!". 나고 죽는 것이 없다는 뜻이니,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훗날 제자들이 이때의 오도송(悟道頌.깨침의 순간을 읊은 노래)에 대해 물으면 스님은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라고 대답하곤 했다.

오묘한 선(禪)의 세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스님은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자기 발견의 작업이자, 만물의 근본 이치를 밝히는 것이 선이다. 자기 발견을 통해 우주 전반의 생성원리를 보고, 자기와 우주가 둘이 아님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참선은 또한 자유를 얻는 길이며, 마음을 쉬게 하는 길이다. 그리고 각박한 시대, 인간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며 내 정신부터 차리고 봅시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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