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771)<제자 김은호>|<제52화>서화백년>(57)|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강계미인 여관 주>
신의주에 머무르는 동안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묵고 있는「수신여관」여주인은 신의주 사회에서 이름이 나 있는 여걸이었다. 그는 얼굴도 예쁠 뿐 아니라 수단도 좋았다. 그는 우라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강계미인인데다 여성으로는 완숙한 38세의 풍만한 몸매를 자랑했다. 서울의 유명한 서화가였던 일주 김진우가 그의 미모에 반해 그림 그려서 번 돈을 모두 그에게 바칠 정도였다.
내가 공교롭게「우신 여관」에 투숙해서 그의 그물에 길려든 것이다.
여주인은 청 요리 집에 전화를 걸어 술상을 벌여 놓고 자기 집에 든 손님들을 불러서 이따금씩 주연을 베풀었다. 그러나 술값은 으레 손님의 숙박비에 얹는 상투적인 수법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 같은 태도가 미웠다. 새벽이면 내방에 건너와 이불 속에 쑥 손을 넣고 허튼 짓을 하면서 방이 춥지 않느냐고 딴전을 피우곤 했다.
반반한 손님이 들어오면 수작을 걸어 그의 호주머니를 털었다. 지천으로 손님을 꾀어내 사랑의 유희를 벌이기도 했다.
실컷 그림을 그려서 말아 놓으면『이것 저 주세요』하고 빼 가기가 일쑤였다. 그걸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한바탕 연극을 했다.
여관에서 심부름하는「성봉」이란 소년을 불러 다른 여관으로 옮기겠다고 짐을 챙기라고 했다. 그랬더니「성봉」이란 녀석이 냉큼 주인 방으로 뛰어가 이 사실을 고해 바쳤다. 여주인이 버선발로 뛰어나와『선생님, 제가 잘못했옵니다』하고 손이 발되게 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의주 사회에서는 기침만 크게 해도 파문이 생기는 김덕기가 부탁했으니 이를 데가 없는 일이었다.
이 기회다 생각하고 버릇을 고쳐 줄 양으로 그녀를 불러 앉히고 다른 일은 노골적으로 나무랄 수 없어 청요리 시켜 먹고 손님에게 물리지 말라고 혼내 주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용서를 빌었다.
나도 남자답게 그전처럼 그녀를 흔연히 대해 주었다.
얼마 안 있으면 신의주를 떠나야 할 참이었다. 하루는 여주인이 소복단장을 하고 내방에 건너와 초상화 한 폭을 그려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그는 내 승낙을 받고 곧 안동 현에 나가 큼직하게 사진을 박아 왔다. 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내는 동안 그녀는 곱게 차리고 내방에 와서 한참씩 앉아 있었다. 행동거지도 지난날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알아보게 품행이 단정해진 여주인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그녀에게 남자란 이런 것이란 인상을 심어 주려고 8폭 병풍 한 채를 해주고 홀연히 신의주를 떠나왔다. 여주인은 내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가 손수 음식을 장만해서 저녁상을 차려 내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났더니 그녀는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40평생을 살아왔지만 선생님 같이 깨끗한 어른은 처음 뵙는다고 나의 정조(?)를 치켜세웠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서울에만 내려오면 으레 우리 집을 찾아왔다.
자기하고 몇 년씩 함께 산 일주의 집이 바로 우리 집과 이웃하고 있는 데도 거기는 들여다 보지도 않고 우리 집은 꼭꼭 들러갔다.
내 집에 올 때는 우리 어머니 비단옷감을 떠 가지고 와서 손수 말라 주기도 했다.
나는 신의주에 묵는 3개 월 동안 3천 원의 거금을 벌어들였다. 이 돈을 집으로 내려보내 화실 짓느라고 진 빛을 갚을 수 있었다.
손에 돈도 좀 잡히고 해서 먼젓번에 의재의 발병 때문에 다하지 못한 중국구경을 더 해볼 생각이 났다. 마침 봉천에 살고 있는 중국인 부호 우국한이란 사람이 채목 회사 일로 신의주에 왔다가 우연히 내 서화 회를 구경하고 감탄, 그림 몇 폭을 사가 그를 알게 되었다.
우국한은 내가 신의주까지 가지고 갔던 『부감』 과 『소』를 보더니 그 자리에서 일금 천 원을 내놓고 사가면서 시간이 있으면 봉천의 우리 집에 한번 와 달라고 초청했다. 우국한은 당시「만주 채목 공사」이사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의 월급은 조선총독이 받는 돈보다 많았다.
그는 19세까지 서화공부를 해서 그림에도 취미가 있었지만 서화감식과 평가안도 높은 교양인이었다.
나는 봉천에 당도하는 길로 그가 그려준 약도를 인력거꾼에게 주고 우국한의 집을 찾아갔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는 금강산유람을 떠나고 집에 없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