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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제자 김은호><제52화>서화백년(51)|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즉석휘호>
일본 궁내성에 찾아가「세끼야」차관을 만나 보니 그는 서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관옥은 조선에 있을 때 조소림·안심전·이관재와 친히 지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실제로 당시 서울의 서화 계 사정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바로 소림·심전 선생에게서 공부한 제자라고 했더니 관옥은 더욱 반가와 했다.
『며칠 후 내 집에서 대신과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동경제대교수 서너 명을 초대할 계획인데 그 때 석상휘호를 해주지 않겠소? 앞으로 동경서 화단생활을 하려면 그런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봐서 우리귀족회관에서 한번 작품발표를 하시오. 모든 일은 내가 도와 드리겠소.』
관옥은 이런 제안을 하면서 며칠 날 자가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나는 정해진 날 관옥의 사저로 갔다.
2층에 넓은「홀」이 꾸며져 있고 벽면에는 유명 대가들의 서화 폭이 수두룩이 걸려 있었다.
관옥은 지필묵을 내놓으며 손님들이 오기 전에 몇 장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매화·난초 등 문인 풍의 수묵화를 여러 폭 그려냈다.
관옥은 내가 휘호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아주 훌륭하다』고 손뼉을 치면서, 『만약 그림이 서투르면 생색이 안 날까 봐 미리
그려 놓았다 주려고 했는데 이런 솜씨면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칭찬했다.
그는 식당 옆에 그림 그릴「테이블」을 마련해 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손님들이 와서 저녁을 먹고 난 후 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석상휘호를 했다.
색 지 5장·족자 감 5장을 내놓고 시원하게 그려 제 꼈다. 그림을 완성시켜 놓았더니 관옥은 손님들에게 족자와 색 지를 한 점씩 고르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즉석에서 그린 그림을 고르면서 퍽 좋아했다.
관옥은 손님들을 보내 놓고 처와 딸을 불러 들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식구들이 보는데서 한번만 더 수고해 달라고 청했다.
관옥의 부인과 딸도 일본화가보다 썩 잘 그린다고 칭찬해마지 않았다.
내가 관옥의 집에 다녀온 후에 일본정계에는 큰 변화가 왔다. 대 정이 죽고 소 화가 즉위한 것이다.
얼마 후 관옥 차관에게서 또 내게 사람을 보내 왔다. 그는 일금 5백원이 든 휜 봉투를 내놓고 갔다. 동봉한 친서에는 일전의 휘호에 대한 사례라는 말과 앞으로 작품 전을 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씌어 있었다.
나는 답례로 지난봄「성덕태자 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던『승무 복』을 보내 주었다.
큰돈도 생기고 해서 나는 소정을 찾아갔다. 그는 워낙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선 술집으로 가서 그의 주량을 채워 주었다.
두 번째로 맞는 객지 동경에서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나는 결성선생에게서 엄격한 화 평을 받으면서 회화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외롭고 쓸쓸할 때는 소정과 함께 시내를 거닐거나, 미술관·박물관 등을 찾아다녔다. 소정도 소실에게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1927년 봄이 되었다. 나는 불현듯 서울에 가고 싶어졌다. 동경에 온지 2년밖에 안 되었건만 10년도 더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잠깐이라도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우리 집은 잔칫날처럼 붐볐다. 몇 해만에 아들과 마주 앉아 상을 받은 어머니는 무척 흐뭇해했다.
그 동안 서울 집은 단우(이용문)가 동경으로 보내 준 학비 중에서 30원씩 떼어 보내 그것으로 근 근이 살고 있었다 .귀국인사를 하기 위해 단우 집을 찾아갔다. 단우는 마침 출타중이고 없어서 집사(비서)만 만났다.
집사가 우리 집 걱정을 하길 래 내가 학비 중에서 30원씩 떼어 보내 그럭저럭 지낸다고 했다. 이 말이 단우에게 들어갔다.
그 이튿날 다시 단우를 찾아가자『내가 사과하겠네. 이당을 동경으로 떠나 보낼 때, 집 걱정일랑 말라고 큰 소리 쳐 놓고 그만 내가 실책을 저질렀네. 어쩌다 이당에게 허언한 사람이 되었으니 용서하게. 앞으로는 내가 권농동 집으로 직접50원씩 보내겠으니 그리 알게』하고 사과했다. 단우는 지난날의 약속을 지킨다면서 내가 동경에서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족을 돌봐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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