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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황제노역' 논란, 민주적 사법 세우는 계기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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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향판(지역 법관)은 없어져야 하는가. 최근 일당 5억원의 ‘황제노역’ 판결에 우리 사회가 경악했다. 그 와중에 향판 제도가 문제의 핵으로 지목되면서 비판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지방에 오래 근무하던 향판들이 그 지역의 토호들과 유착해 봐주기식 판결을 서슴지 않는 작태가 속출한다는 것이다. 급기야 법원행정처까지도 비판 여론에 따라 향판 제도를 사실상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향판의 신규 임용이나 갱신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향판이 사라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법관들을 7~8년마다 심사해 다른 지역에 전보하거나 아예 부장판사로 승진할 때 다른 권역으로 발령내는 방안도 검토되는 모양이다. 문제가 터지면 발 빠르게 원인 하나를 지목해 여론을 집중시키고 이런저런 대책으로 미봉해 버리는 우회전술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달의 근원은 향판의 폐해에 있다. 친지나 동창 등의 인적 네트워크가 일부 ‘영감님’들의 권위와 지위에 어울리는 생활을 뒷받침해주고, 판검사들은 알게 모르게 이들의 영향력을 강화해 주는 공생적 후원체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향판-향검-향변(향판·향검 출신 변호사)의 강력한 연합에 지역의 유력자들이 유착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법률관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비슷한 폐해가 나타난다는 데 우리 사회의 고통이 존재한다. 전관예우가 만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폐단들은 지역을 넘어 법원과 검찰에 편재한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재벌 정찰제’는 대기업 오너를 위한 경판(서울지역법관)의 폐악이다. 기업에는 유리하고 노동자에게는 불리한 판결들은 법원과 자본의 유착을 암시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향판의 폐단이 보험형의 유착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같은 유착은 이미 사법부의 한 부분으로 고착된 것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얻어먹되 봐주지는 말자’는 것이 일부 향판이나 향검의 자기방어용 슬로건이라면, ‘그가 원하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라는 것은 권력의 의중에 자신의 사고 자체를 맞추어버린 법관과 검찰의 자기 보신형 슬로건이다. ‘봐주지 말자’고 하면서 후원자들이 보기 원하는 것만 보고, 법적 양심을 내세우면서 법조문으로부터 권력의 의지만을 읽어낸다. 그래서 이미 유착은 사법체계의 한 부분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사법부의 개선은 너무도 무력하다. 실제 10년 전 향판 제도 도입 당시부터 그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향판의 개인적인 비리 차원에서만 처리했다. 지역에서의 유착이 중앙의 부담으로 전가되지 않는 한 모르는 척해왔을 뿐이었다.

 다른 유착도 마찬가지다. 전관예우는 물론 ‘대기업이나 정치권력에 대한 솜방망이 사법’ ‘자본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사법’이라는 해묵은 비판에 대해선 그 정도의 반응도 찾기 힘들다. 도리어 대법원 스스로 법과 정의를 변형해 비판의 심판대에 올라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우리의 사법체계는 멍들고 부서지고 있는 셈이다.

 황제노역 사건이 향판의 문제에 그치지 않음은 이 때문이다. 지역의 법조 3륜이라는 연합세력에 토호가 유착하듯 중앙의 사법권력 역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유착하면서 부정과 부패를 생산한다. 향판을 폐지한다고 해서 이 유착이 깨어지지 않듯, 얽히고설킨 이 공고한 사법네트워크의 틀도 쉽게 깨어지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안정적으로 재판할 수 있도록 한다는 향판 제도의 순기능을 일거에 부정하고 나선 대법원의 발상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역에 터잡은 사법체계는 선진적인 사법체계를 가진 나라에서도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법원행정처의 지원을 받는 대법원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앙집권식 인사체제 자체가 오히려 생소한 쪽이다. 이런 인사체제를 없애고 법관의 지역화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승진을 위해 권력자의 의향에 법관의 양심을 맞추는 폐습들을 해소하는 것이 보다 본질에 접근하는 방책이다. 향판의 문제는 철저한 감찰과 더불어 지역사회 내에서 견제와 통제의 장치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해소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의 법관선거제는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변호사의 수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소수의 법조인들이 연합해 전횡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황제 노역’ 사건의 결말은 향판의 제거가 아니라 더욱 넓은 차원의 사법개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판검사 임용과 감찰과정에 시민대표가 참여하도록 하는 등 법관의 전횡을 시민사회가 유효하게 견제하는 민주적 사법의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사법개혁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사법의 독립을 지향해 왔다면 이제는 그 사법을 법률관료가 아니라 우리 시민의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