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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 세상에 근심·걱정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흔히 말하듯 고독이 현대인의 병이라면 고민은 목숨의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잠 못 이루는 긴긴 밤을 고민과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가슴 속 응어리진 번뇌를 누구에겐가 한 번쯤 널어놓고 싶은 충동을 겪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기야 자신의 고민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할 것이지만, 그들에게 깊은 이해와 애정 있는 설복이 주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실로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사람들이 성격적으로 극심한 「커쿠닝」(상호자폐상태)에 빠져들게 된 것은 오늘의 시대의 고통적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누에고치처럼 철저한 자기방어·자기폐쇄상태에선 남과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웃 없는 사회」·익명성이 강한 도시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얼마 전 자살하려고 한강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한 여인의 몸부림 앞에 구름 떼처럼 모여든 군중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운 사건이 이 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
이처럼 인정과 사랑이 메마르고 가슴으로 하는 봉화의 가교가 무너져 가고 있는 이때. 이 나라에서도 시도된 「생명의 전화」운동(5면 기사참조)의 의의는 그런 대로 크다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교역자들에 의한 이 운동은 「전화선교」·「거리의 폭음전도」의 뜻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간해서는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고민을 비밀이 보장되는 전화를 통해 호소케 하고 상담에 응해 줌으로써 끝없는 위안과 구원감을 주려는 것이다.
1963년 호주 「시도니」의 「앨런·워커」목사에 의해 시작된 이 전화를 통한 「카운슬링」사업은 「생명선」·「자살방지센터」등의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3년의 준비기간 끝에 지난9월1일부터 시작돼 벌써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에 친절한 도움과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평균 1백50명에 가까운 전화상담에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은 첫째 10대·20대의 청소년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과, 그리고 이들의 고민이 주로 이성문제라는 사실이다. 흔히 「제2의 탄생」이라 불리는 청춘기는 꿈 많고 아름다운 인생의 황금시기인 동시에 감수성이 예민하고 갖가지 회의와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는 시절이다. 원대한 이상을 품고 대망에 불타다가도 어느 사이엔가 까닭 모를 불안과 좌절감에 사로잡히고, 불면증·우울증·염세 중에 빠지게 되어 급기야는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여드름·변성·초경·몽정 등에서 비롯된 신체적 발육과 생리적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이성에의 그리움·자위행위·혼전성교와 심지어는 화류병 등으로 심리적 갈등을 겪게되는 것이다.
최근 모 의대교수가 발표한 보고에도 우리 나라 도시 청소년가운데에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다는 심각한 고민을 고백한 「신경증적 증상」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하거니와, 이는 또 지난 75년 한햇 동안에 발생한 5만9천46건의 청소년범죄의 원인 분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중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의 전화」이용자의 절대 다수가 고민하는 청소년이라는 사실은 곧 가정이나 학교가 이들의 의논 상대 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민의 주원인이 이성문제라는 데는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젊은 시절에 누구나가 겪는 홍역 같은 열병이요, 또 이는 무이념·무사상한 현 사회풍조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는 애정을 갖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지도해야 하고 유해경경을 바로잡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 이와 함께 청소년들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는 인생살이에 수반된, 사유하는 인간의 속성임을 인식하고,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인격적 성장을 기하는데 게으름이 없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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