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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AFKN 키즈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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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워리어 사망.

 지난주 후반 포털사이트 주요 뉴스를 장식한 헤드라인이다. 워리어 사망 소식에 놀라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워리어 사망 소식에 놀란 한국 사회에 더 놀랐다. 워리어에 열광한 세대는 제한돼 있어서다.

 얼티미트 워리어(Ultimate Warrior)는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활약한 미국 프로레슬링 선수다. 한국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그러나 한때 우리 사회에는 그를 영웅으로 떠받든 특정 세대가 있었다. 지금 나이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 성별로 남성이 절대 다수다.

 그러니까 토요일에도 학교에 가던 시절이었다. 오전수업은 대충 때우고 친구들이랑 오락실(PC방이 아니다)에서 놀다 집에 들어가던 토요일 오후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TV부터 틀었다.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 딱딱 소리 나는 다이얼을 돌려 숫자 2에 맞췄다.

 2번 채널. 1996년 TV에서 사라진 AFKN (주한미군방송)이다. 저녁이면 지붕에 올라가 안테나 돌리며 “보여? 보여?” 소리치던 시절, 한여름에도 배불뚝이 브라운관에서 눈이 내리던 그 시절, 2번은 태평양 건너 미국을 우리 집 안방에 가져다 놓는 마법 같은 채널이었다. 그 2번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WWF(지금 WWE의 전신)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였고, 그 WWF의 최고 인기 선수가 워리어였다(헐크 호간이 최고라고 우기는 뭣 모르는 애들도 있었다).

 워리어는 이름처럼 최후의 전사였다. 여느 선수처럼 거들먹대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강렬한 전자기타 음이 터지면 워리어는 지체 없이 달려나갔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링을 흔들었다. 경기도 싱겁게 끝냈다. 반칙을 일삼는 악당에게 내내 당하다 막판에 무찌르는 뻔한 줄거리는 워리어의 것이 아니었다. 워리어는 공 소리가 나기 무섭게 상대를 몰아붙였고, 자신보다 더 큰 상대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던져버렸다. 워리어는 매번 이겼고, 영웅의 승리는 매번 통렬했다.

 워리어가 TV에 나온 날이면 AFKN 키즈들은 나름 비장한 의식을 치렀다. 머리를 잔뜩 헝큰 다음, 아직 가는 팔뚝에 형광색 신발끈을 묶고 꽥꽥 악쓰며 빨랫줄을 흔들었다. 그러다 엄마한테 맞았다.

 동갑내기 소설가 김경욱은 우리 세대를 “텔레비전만 볼 수 있다면 밥이 없어도 좋았던” 세대라고 쓴 적 있다. 그의 말마따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텔레비전이었을 터다. 영웅의 죽음을 애도한다. 한 시절의 마감을 슬퍼한다.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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