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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같이 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조총련계 재일동포 추석성묘단 제6진 4백50여명이 3일 상·하오에 걸쳐 김포공항에 도착, 조국의 품에 안겼다.
「오오사까」(대판)「도오고」(동경)「혹가이도」(북해도) 거주자들인 이들 동포들은 이날상오11시30분 특별기편으로 1백90명이 들어온 것을 비롯, 다섯차례에 걸쳐 입국, 이로써 지금까지 고국을 찾은 추석성묘동포는 모두 2천5백명을 돌파했다.
2일 제5진 동포가운데는 지난달 31일 상오9시 일본NET-TV가 주선한 우주중계(「프로」명·『서울의 아침』) 로 서울에 사는 부인 박봉이씨(68·서대문구율관외동175의25) 와 31넌 만에 현해탄을 사이하고 화면상봉을 했던 김영섭씨(68·동경거주)가 입국, 부인과 아들 딸 등 10여명의 육친지들을 만나 감격의 울음을 터트렸다.
김씨는 자기의 얼굴이 방송된 후 낯모르는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고『한국에 가지 말라』고 방해했으며 떠나는 날 상오6시까지 집 주위를 지키고있어 민단에 도움을 청해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노부부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우리 늙은이들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며 더 이상 말문이 막힌채 한없이 흐느꼈다.
조국의 첫 밤을 가족둘에게 둘러싸여 보낸 김씨는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그저 꿈만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처남 박축멱씨(59)가 아들·딸·며느리·손자 순으로 인사를 시키자 김씨는『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며 이들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김씨는 부인 박씨를 보고 TV 화면보다 더 늙어 보인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고 『서울이든 동경이든 이젠 같이 살자』며 처와 4남매를 생각, 30여년 동안 정식결혼을 하지 않은 채 상봉할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김씨는 해방되던 45넌5월 공습을 피해 처와 4남매를 고국으로 먼저 보낸 후 폭격으로 알몸이 되었다.
종전 후 동경에서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 현재는 동경도 세전곡구 세산곡정에서 마작구락부를 경영하는 등 생활의 기반을 잡았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에 여러차례 편지를 내 가족들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소식조차 모르고 생이별을 하게 됐다는 것.
주위에서 새 장가를 권유했으나 뿌리치자 26년전 한 친구의 간곡한 권유로 일본여인을 만나『언제고 가족을 찾으면 가족곁으로 돌아간다』는조건으로 동거를 시작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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