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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리버풀 원한다" 16년 바친 남자, 제라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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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리버풀의 ‘영원한 캡틴’ 스티븐 제라드(오른쪽)가 13일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2-2로 맞선 후반 33분 결승골을 넣은 필리페 쿠티뉴와 격하게 기쁨을 나누고 있다. 16시즌째 ‘리버풀 맨’인 제라드는 24년 만의 리그 우승 도전을 이끌고 있다. [리버풀 로이터=뉴스1]

리버풀이 맨체스터시티(맨시티)를 3-2로 꺾은 13일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 리버풀 주장 스티븐 제라드(34·잉글랜드)는 종료 휘슬이 울리자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팔뚝으로 훔쳐냈다. 생애 첫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우승을 향한 최대 고비를 넘겼지만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았다. 동료와 둥글게 어깨동무를 한 제라드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잘 들어, 잘 들어. 맨체스터시티를 이겼어. 우리는 이제 노리치로 간다. 오늘과 똑같이, 우리는 다시 이기러 간다”고 말했다.

 이날 맨시티를 꺾은 리버풀은 승점 77(24승5무5패)로 2위 첼시(승점 75), 두 경기를 덜 치른 3위 맨시티(승점 70)를 따돌리고 단독 선두를 달렸다. 노리치시티전을 포함해 남은 4경기를 다 이기면 자력 우승이다.

 리버풀은 잉글랜드 정규리그를 18차례나 제패했지만, 최근 명문의 위용을 잃어버렸다. 마지막 리그 우승은 24년 전인 1990년이다. 92년 리그가 EPL로 바뀐 뒤 21시즌 중 13차례나 우승한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통산 최다 우승(19회)도 내줬다. 리버풀 팬들은 맨유 팬들로부터 “항구도시 리버풀엔 정박할 수 없는 배(ship)가 하나 있다. 바로 프리미어십(premiership)”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제라드는 아픈 리버풀 역사의 산증인이다. 98년 리버풀 1군 무대에 데뷔한 제라드는 16시즌 동안 리버풀 유니폼만 입고 뛴 ‘원클럽맨(One club man)’이다. 제라드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지만, 정규리그 우승 트로피만 들어올리지 못했다. 리버풀 팬들은 올해 ‘영원한 캡틴’ 제라드를 중심으로 24년 무관의 한을 털어낼 거라 굳게 믿고 있다. 제라드는 23살이던 2003년부터 현재까지 주장을 맡고 있다.

 제라드는 ‘뜨거운 심장형 리더’다. 감동과 신뢰로 팀을 이끈다. 사실 제라드는 리그 우승을 차지할 기회가 있었다. 2005년 첼시가 3000만 파운드(약 522억원)에 영입 제의를 했다. 하지만 제라드는 “내 심장이 리버풀을 원한다”며 잔류를 택했다. 이 메시지는 지금까지도 리버풀 동료와 팬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이스탄불의 기적’은 제라드 리더십의 결정판이다. 리버풀은 2005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AC밀란(이탈리아)과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 전반을 0-3으로 뒤졌다. 하지만 제라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추격하는 골을 넣고, 동점골의 실마리가 되는 페널티킥도 유도했다. ‘리더’의 투지는 동료의 자발적 동참을 이끌어냈다. 3-3 동점을 만든 리버풀은 승부차기 끝에 기적적으로 정상에 섰다. 지네딘 지단(프랑스)은 “팀을 지탱하고 이끄는 능력은 제라드가 세계 최강”이라고 극찬했다.

 제라드의 리더십은 올 시즌에도 빛났다. 개막 전 리버풀은 우승 전력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 시즌 경기 도중 상대의 팔을 물어뜯은 ‘핵이빨’ 루이스 수아레스(27·우루과이)는 이적설이 끊이지 않았다. 제라드의 중재로 수아레스는 브렌든 로저스 감독과 화해하고 팀을 위해 뛰게 됐다. 수아레스는 “제라드 때문에 남기로 했다. 난 그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기량뿐만 아니라 인격도 최고”라며 잔류를 택했다. 올 시즌 개과천선한 수아레스는 29골을 터트렸다. 리그 득점 1위다.

 축구는 하프타임을 제외하면 작전타임도 공수교대도 없다. 경기 휘슬이 울리면 주장은 그라운드 위의 사령탑이다. 위대한 캡틴들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디에고 마라도나(53), 리오넬 메시(27·이상 아르헨티나) 등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팀 운명을 바꿔놓는 ‘마법사형’이다. 강력한 포스로 팀 전체를 자극하는 ‘카리스마형’도 있다. 로이 킨(43·아일랜드)과 카를레스 푸욜(36·스페인)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제라드처럼 희생정신이 투철한 ‘뜨거운 심장형’이 있다. 한국 대표팀의 구자철(25·마인츠)도 이 유형에 가깝다. 3월 초 득남한 뒤 감독이 휴가를 줬지만 팀에 머무르며 경기에 집중했다. 브라질 월드컵 주장을 맡을 가능성이 큰 구자철에게 제라드의 행보는 큰 울림을 준다.

박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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