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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비|신라의 불상|정영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통일신라미술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전통 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국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개화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통일시대에 들어서서의 신라불상은 전대의 양식을 전승 소화하고 그동안 쌓은 조각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이 당의 양식을 흡수하면서 원숙한 기법과 깊은 신앙의 바탕 위에 실로 신라불상조각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때를 8세기 중엽인 통일성대를 보아 그 대표작을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여래좌상을 들 수 있겠으며 이 걸작을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정화라고 일컫게 되는 것이다.
삼국기의 불상이 거의 소형의 금동불인데 대하여 통일시대에는 금동불의 조성이 그대로 진행되는 한편 대형의 석조불상이 많아졌다. 그리고 금동불과 같은 일정한 형식의 조형에서 탈피하여 석불에서는 그들의 묘기를 더욱 마음껏 부릴 수 있었다.
전대의 불상이 긴장된 상호라면 신라에서는 입가의 미소에서 비롯되어 양쪽 볼과 눈 언저리에까지 전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더욱 자비스럽다. 전대불상의 동체가 위축된 감을 준다면 신라불상의 몸매는 보다 자유로와 유연함이 이를데 없으니 허리를 약간 꼬면서 천의를 양쪽으로 펼친 불·보살 등은 역시 일품이라 하겠다.
이번 일본에 전시되었던 안압지출토 금동여래삼존상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모시고 좌·우에서 협시보살이 시봉하고 있는 삼존상으로서 우선 조성규모가 훨씬 크고 또한 삼존이란 점에서 위압감을 느낀다.
특히 양쪽 협시보살의 허리와 유연한 몸매에 매혹되며 투각광배와 연화좌의 화저함, 그리고 본존의 자비스러운 상호는 실로 신라금동불을 대표할 수 있는 국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역시 삼국통일로 인한 국력의 충실과 정치적 안정으로 우수한 불상을 조성할 수 있는 바탕을 가진 신라인들이기에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라 믿는다. <단국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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