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실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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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법에는 과실 책임이라는 개념이 있다. 『고의 또는 과실로 남의 권리를 침해한 자는 여기서 생기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대충 이런 뜻의 구절이 우리네 민법에도 적혀 있다.
「고의」란 자기 행위가 남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하는 줄 빤히 알면서도 저지르는 경우를 말한다.
「과실」이란 자기 행위가 남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대도 불구하고 부주의로 소홀히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과실」의 한계를 명확히 가리기는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이 「밀라노」 교외의 한 공장에서 흘러나온 「디옥신·개스」 오염으로 주민들이 급히 대피하지 않으면 안될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경우 공장주가 충분한 방지 설비를 갖췄다면 「과실」이 아니게 된다. 이런 사태를 전혀 예견할 수 없었을 경우에도 「과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책임을 모면할 수 있을까?
이래서 무과실 책임의 원리도 전혀 버릴 수 없게 된다. 가령 정비를 철저히 한 여객기를 유능한 「파일러트」가 조종하다 불의의 기상 사정으로 추락했다고 하자. 이런 때엔 항공사 쪽에 「과실」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유족들에 대한 보상을 전혀 안 해도 좋을까?
각설하고, 국내의 어느 야금 공장에서 일하던 한 근로자가 「크롬」산화물 중독에 걸려 콧속 물렁뼈에 구멍이 뚫린지 9개월째나 된다.
그 동안 회사측에서는 전혀 치료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작업 환경의 개선에도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경우는 분명히 과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강제하기도 어려운 모양이다. 「크롬」 오염으로 동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고통을 겪게될 경우에도 이에 대비한 무과실 책임주의가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틀 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공해의 씨가 되는 화학 물질에 대한 철저한 규제가 4백여 종에 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종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규제가 있다는 얘기조차 별로 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유독 화학 물질을 다루는 공장은 우리 나라에서도 수백개가 된다.
따라서 언제 우리 나라에도 「밀라노」 교외에서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과실 책임만이 아니라 무과실 책임에 대한 입법을 서둘러야할 것이다.
「사람은 그 생활에 있어 존엄과 (복지)를 보전할 수 있을만한 환경에서 적당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는 기본 권리를 갖고 있으며, 또 장래의 세대를 위하여 환경을 보호·향상시키는 엄숙한 책임을 갖고 있다….」
지난 72년 「스톡홀름」에서 발표된 「인간 환경 선언」의 한 구절이다. 우리가 거듭 새겨보아야 할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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