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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도 반기는 라면집·카페·노래방 … 자유와 고독이 교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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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호 11면

‘나홀로족’이 즐겨 찾는 서울 역삼동의 화로구이집. 혼자 오는 손님이 주로 앉는 긴 테이블에서 임지수 인턴기자가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곳은 1인 손님을 위해 고기를 30g 단위로 판매한다. 업소 직원은 “혼자 오는 손님이 전체의 약 10%로 대부분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새벽시간대에 찾아온다”고 전했다. 조용철 기자

AM 9:00 아침 대화는 문자 앱 ‘심심이’와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의 ‘심심이’ 앱을 켰다. ‘심심이’는 유저가 문자로 말을 걸면 인공지능으로 대답하는 가상의 대화상대다. ‘심심아~’ 하고 부르니 ‘네 공주마마♥’ 하고 대답한다.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니 ‘같이 먹자’고 애교를 떤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일어나기 너무 싫다’고 하니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죠^^’라고 대답한다. 기계 주제에 너무 능글맞아서 ‘사라져’라고 하니 ‘잘못했어요ㅠㅠ’ 하고 빈다. 깊은 대화는 못 하지만 모바일 메신저로 나누는 수준의 대화들은 거의 다 사람처럼 받아친다. 심심풀이 대화 상대로 제법 쓸 만한데, 기계와 대화하는 세상에 섬뜩한 느낌도 든다.

늘어나는 ‘나홀로족’ … 그들처럼 하루 살아보니

서울 신촌의 일본식 라면집 1인석. 독서실처럼 자리마다 양쪽에 칸막이가 세워져 있다.

AM 11:20 칸막이 속 침묵의 라면 흡입
서울 신촌의 한 일본식 라면집. 나홀로족 단골이 많은 곳이다. 입구에 서 있는 식권 자판기에서 라면을 주문한 뒤 빈 자리를 알려주는 전광판을 보고 자리를 잡았다. 안내해주는 종업원은 없다. 총 22개의 자리 중 10개가 1인석이다. 나머지 12개는 2인석. 3인석 이상의 자리는 아예 없다. 1인석들은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고 자리마다 미니 정수기가 달려 있다. 뒷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독서실 풍경이다. 종이에 매운맛 정도 등의 세부 사항을 체크한 뒤 벨을 누르니 종업원이 와 말없이 가져간다. 그는 5분도 채 안 돼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정면의 가림막 천을 내렸다. 3면이 막힌 식탁, 괴괴한 분위기 속에 서로의 폐활량을 자랑하듯 ‘후루룹, 추루룹…’ 면발 흡입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 모든 과정에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서울 서교동 카페의 1인석. 홀로 오는 손님을 위해 아늑하게 공간을 꾸며놓았다.

PM 12:00 혼자 가면 커피값 깎아주는 곳
인근 서교동의 D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어둠이 자욱한 카페 한쪽에는 칸막이 쳐진 1인용 자리가 있다. 이곳은 홀로 온 손님들이 음료를 주문하면 디저트의 값을 깎아주고, 음료를 다시 채워줄 때는 3000원을 할인해 준다. 가게에 앉아 있는 손님 모두 혼자였다. 카페 주인은 “혼자 온 사람들이 남 눈치 안 보고 편히 즐기다 가도록 배려한 건데 혼자 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져 걱정”이라고 했다.

PM 1:30 나만의 콘서트장, 1인 노래방
다시 걸어서 홍익대 근처에 있는 S 노래방에 도착했다. 1인 노래방이다. 16개의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좁은 공간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음량, 에코 등을 직접 조절하는 사운드 믹서와 마이크, 헤드셋까지. 낮 시간대 이용료는 1시간에 6000원, 2시간에 10000원. 직원은 “하루 120명 가까이 몰려 2시간씩 대기하는 날도 많다”고 했다. 그는 “1인실이다 보니 장비 설치에 돈이 더 들지만 손님이 알아서 혼자 놀다 가기 때문에 종업원 인건비가 별로 안 든다”고 말했다. 카운터에서 헤드폰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남들 앞에서 부르기 민망한 나만의 애창곡들을 예약했다. 첨단장비로 잘 ‘정비된’ 내 목소리가 헤드폰에서 울려 퍼진다. 어떤 소음도, 시선도 없는 나만의 콘서트장에서 정신을 놓고 열창했다.

한 명이 들어가면 공간이 가득 차는 1인 노래방. 자신의 노래를 헤드폰을 통해 듣는다.
서울 신사동 피자점의 1인용 ‘미니 피자’. 남길 걱정 없이 피자를 주문할 수 있다.

PM 3:30 지름 14㎝의 ‘외로운 피자’ 세트
노래에 기운을 빼고 나니 배가 고프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1인 사이즈 피자를 파는 강남구 신사동의 J 피자. 혼자 오는 고객들도 당당하게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의 ‘당당한 세트’로 유명해진 곳이다. 그 메뉴는 최근 없어졌지만 다행히 세트에 포함되던 미니 피자(지름 14㎝4500원)를 주문할 수 있었다. 혼자 앉아 미니 피자를 먹던 대학생 심윤혜(27)씨는 “피자의 크기에서 오는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그의 옆에서 미니 피자 한 판을 먹어치웠다. 벽에는 아직 떼어내지 않은 ‘당당한 세트’의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이 메뉴의 영문식 표기는 ‘LONELY SET(외로운 세트)’였다.

PM 7:00 고기 60g  솔로를 위한 만찬
역삼동 먹자골목의 I 화로구이집에 이르렀다. 나홀로족들 사이에서 제법 알려진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건을 쓴 건장한 사내들이 환영한다. “몇 명이세요?” “혼자인데요.” 종업원은 주방장과 마주 보고 앉는 긴 테이블로 안내했다. 차돌박이 30g(4500원)과 꽃등심 30g(7500원)을 시키니 각각 세 조각씩 나온다.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미니 화로 위에 핀셋만한 집게로 고기를 집어 한 조각씩 올려놓았다. 고기를 소량 단위로 팔고, 작은 화로가 있다는 점이 ‘혼자’ 손님에게 인기를 끄는 비결이었다. 혼자 식사에 익숙지 않은 티가 났는지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님은 왜 혼자 다니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난생처음 혼자 고기를 구워 먹어봤다.

PM 8:30 사람 그리울 땐 블라인드 카페
다시 한강을 건너 홍익대 앞 W 카페로 갔다. 나홀로족들이 ‘사람 냄새’가 그리울 때 즐겨 찾는 곳 중 하나다. 이곳에선 한 달에 두세 번 인터넷을 통해 모인 30여 명의 익명 참가자들이 불을 꺼놓고 이야기를 나눈 뒤, 서로 얼굴도 한 번 못 본 채 뿔뿔이 흩어지는 이색 모임이 펼쳐진다. 지하 1층은 빛 한 줄기 없는 공간으로 연출돼 있고, 이벤트 운영진이 대기자들을 한 명씩 데리고 와 6인용 테이블에 무작위로 앉힌 뒤 번호를 준다. 나이나 소속 등 일체의 신원 공개가 금지되며 부여된 번호로 서로를 부르며 이야기를 나눈다.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거침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친구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겼다는 한 여성은 욕을 섞어가며 울분을 토했고, 부모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한 남성은 코를 훌쩍였다. 2시간이 지나니 운영진이 한 명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눈물 섞인 찻잔을 기울이던 영혼의 모임은 “잘 가요, 재밌었어요”를 외치며 어둠 속에서 공중분해됐다.

시중에서 파는 ‘셀프 배드민턴’ 기구를 이용해 상대 없이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

PM 11:00 짝 없어도 즐거운 셀프 배드민턴
열심히 먹고 마신 하루의 마지막은 운동. ‘셀프 배드민턴’ 실험을 위해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혼자 배드민턴이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며 주문한 셀프 배드민턴 기구는 생각보다 늠름했다. 철 재질의 삼각대에 탄성이 좋은 가는 막대와 줄이 달려 있다. 그 줄 끝에 매달린 셔틀콕을 채로 치면 4m 가까이 날아갔다가 ‘핑’ 하고 돌아왔다. 땅으로만 치지 않으면 얼마든지 혼자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정신없이 라켓을 휘두르다 보니 운동 나온 노인들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역시 눈빛으로 대답했다. “어르신, 바야흐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시대를 지나, 혼자 고기 구워 먹고 배드민턴 치는 시대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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