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예술세계 수묵시화첩에 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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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지하(사진) 시인은 시인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정치적 행동과 발언, 생명과 율려.문예부흥 등의 운동과 사상으로 끊임없이 시대를 일깨우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김씨가 매화 향기 가득한 계절에 문자향(文字香)과 묵향(墨香) 그윽한 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 (창작과비평사.2만원)를 내놓았다.

이 시화첩은 지난 2년간 전국의 절을 순례하며 쓴 시 32편에 매화.난초.달마를 주제로 한 수묵화(水墨畵)를 한점씩 엮은 것. 수묵에는 시 한 구절씩이 써 있다.

"검은 숲 속/흰 길의 끝// 풍경(風磬) 끊긴/어두운 잠의 문전(門前)//이마 위/불빛 부서지는 적요(寂廖)의 끝//발길 끊긴/불면(不眠)의 지옥의//아아, 붉디붉은/사천왕천(四天王天)의 문전(門前)//내 여기 잠시 기도하거나/잠깐 쉬거나 혹은/해탈을 마지못해 포기하거나//그것으로 애오란/내 삶의/끝/끝을 세우는 불면(不眠)의 지옥의//아아, 저 훠언히 밝은 흰 길/활활활 불이 붙는/지장(地藏)의 문전(門前)//돌아가리라//풍경(風磬) 대신/락이며 랩이며/뽕짝이며 잡가(雜歌), 리듬앤블루스며/쿵쿵쿵 울리며/죽임 죽어가는 초량(草梁) 거리여/남포동(南浦洞)이여/돌아가리라"('지장암(地藏庵)'중)

석가모니불의 입멸(入滅) 후 미륵불이 오기까지, 즉 신이 없는 세계에서 중생을 보살피는 지장보살. 그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암을 둘러보고 쓴 위 시에는 매화를 그렸다. 등걸은 굵고 진하며 고통스럽게 휘게, 꽃은 엷은 먹으로 환하고 이쁘게 그리며 흑백, 농담(濃淡)의 대비를 드러냈다.

이 시화첩을 내며 김씨는 "공색(空色)과 청탁(淸濁)이 함께 하듯이 잘난놈과 못난 놈은 반드시 엇섞이게 마련이다"며 아름답고 추함의 섞임의 미학을 강조하고 있다.

시서화를 아우르며 좀더 열린, 융통성의 세계로 다가서고 있는 김씨의 세계를 이번 시화첩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0, 70년대 오랜 투옥과 도피 생활로 말미암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달여 병원 신세를 진 김씨는 최근 퇴원, 다음 일을 기획하고 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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