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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교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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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 그린비, 1만3천9백원

책 제목부터 좀 낯설다. 그런 요소 때문에 재미가 덜하겠다는 느낌부터 들기 십상일 것이다.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뒷 말에도 불구하고 연암 박지원의 고전 '열하일기'가 제목 앞을 척하니 가로막고 있으니 답답해보인다.

이 책은 그런 예감을 보기좋게 뒤집어 놓을 만한 좋은 읽을거리다. 조선조 사회에 대한 약간의 예비정보와 지적 호기심만 있다면, "이토록 빨려들 듯 읽히는 인문학서가 나왔다니"하고 놀라실 것이 분명하다.

"개그의 향연! 만약 '열하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나는 컨셉을 이렇게 잡을 작정이다. 고전을 중후하게 다루기를 원하는 고전주의자들은 마뜩찮아 할 터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유머없는 '열하일기'는 상상할 수 조차 없으니. 아니 '열하일기'는 유머로 시작해서 유머로 끝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도처에서 유머를 구사한다."(2백29쪽)

인용문에서 보듯 스스로를 '고전 평론가'로 불려지기를 원하는 저자 고미숙(44)은 18세기 조선시대의 '스타 지식인'인 연암이 얼마나 매력 넘치는 '문제적 인간'인가를 보여주는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 연암은 스스로를 '소소(笑笑)선생', 요즘 말로 개그맨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먹거리가 술이고, 가장 자주 나오는 낱말이 '포복절도'라고 한다.

연암이 여행 중에 보고들은 정보들로 채운 '열하일기'는 중국의 장터에서 벌어진 마술, 열하지역에서 당시 칠순 잔치를 벌인 중국 황제(건륭제)와 함께 관람한 카드섹션쇼, 당시 여성들의 패션과 세태 등에 관한 스토리는 물론 두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중국 땅을 건너가는 연암의 모험과 속마음을 시시콜콜할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요소요소에 우스갯소리를 다량 집어넣고 있어 저자는 '얄개 연암'이라는 표현까지 구사할 정도인 이 글은 그러나 상식적인 기행문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 별난 산문을 놓고 그동안 고전문학계는 정확한 성격을 규정짓지 못해왔다. 어떤 카테고리로 포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연암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이 튀는 글을 조선 중세 지식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려한 주도면밀한 전략의 하나로 풀이한다. 그렇다. 그것은 충분하게 계산된 전략이었다.

18세기 조선 성리학이란 이름의 앙상 레짐(구체제)에 숨이 막혔던 연암은 삐딱이, 방외자(方外者)임을 자처했고, 도발적인 글쓰기와 웃음이란 무기를 통해 응전을 한 것이다.

같은 시대의 다산이 성리학의 먼지를 털어내 그것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한 '진지한 개혁가'라면, 연암은 낡은 상투성을 내부에서부터 허물려했던 '악동(惡童) 해체주의자'의 길을 걸었다는 선명한 차이점을 분석한 보론(補論)은 이 책의 백미다.

이런 식의 연암 해석이란 '열하일기'를 비롯해 '호질' '양반전' 등에서 나타난 그의 문체에서 친구 관계, 호탕한 성품 등에서 거듭 확인된다.

중요한 점은 이 책의 등장은 '사건'에 속한다는 점이다. 먼지 쓴 한문 고전을 이렇게 유쾌하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재해석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가 대학이라는 제도권 학문 기관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지식인 공동체를 겸한 연구소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일하고 있다. 또 이런 책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책 뒤를 보면 이번 저술이 최근 몇년 새 쏟아졌던 7권의 좋은 영향 아래 지어질 수 있었음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다.

한양대 정민 교수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태학사)를 비롯해 김영호의'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 김용옥의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통나무), 연암의 친구 홍대용의 책 번역서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다'(돌베개), 이진경의 '노마디즘'(휴머니스트)등이 그것이다.

한편 이 책은 '리라이팅 클래식'시리즈의 첫권. 동서양의 고전에 대한 젊은 학자들의 탄력적 해석과 2000년대식 글쓰기의 한 모델을 보여줄 이 시리즈는'홉스봄 3부작''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종의 기원'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 신간들 중 양질의 기획물로 주목된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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